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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2
four진08-04 02:54 | HIT : 86
22.  사고유발자

  이번에는 해바라기 센터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다. 아이 아빠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야 하니 은제를 방문시키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 기관이냐, 물으니 성폭행 피해를 당한 부녀자들을 지원하는 곳이라고 했다.
  기어코 아이 아빠를 성폭행범으로 몰아야 하느냐, 물으니 신고가 들어온 이상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라고 했다. 법이 그러하니 자신들도 어쩔 수 없다는 얘기였다.
  정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애 아빠의 성추행이나, 성폭행으로 몰고 갈 만 한 사안이 아니었다. 부녀간에 대화와 이해만 충분하다면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쨌든 신고가 들어왔으니 조사는 어쩔 수 없다는 그들의 입장은 십분 이해한다고 치자. 그래도 그녀에게는 보호자의 입장이란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의견 따위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불응할 경우 괘씸죄까지 추가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법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경험도 없고, 도움을 줄 사람 하나 없는 힘없는 약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뿐이었다.
  마침 주중에 공휴일인 현충일이 끼어있었다. 상담사는 그 날 오라고 그녀의 의향 따위는 묻지도 않고 약속을 잡았다.
  해바라기 센터는 시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의료원 부지 내 별관에 위치해 있었다.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센터 상담사와 경찰, 그리고 국선 변호사였는데 성폭행이라는 민감한 사안 탓인지 모두 여자였다.
  상담사는 그녀를 잠시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라 내보내고는 은제 혼자만 데리고 상담을 조사를 시작했다.
  6월의 태양이 유난히 뜨겁고 몹시 더운 날이었다. 별관 밖으로 나오자, 갈 데라고는 의료원 건물과 나무가 무성한 산책로 외에는 없었다. 그녀는 산책로로 천천히 걸어갔다. 환자복을 입은 환자 두 명과 일상복을 입은 세 명의 남자들이 등나무 넝쿨이 우거진 벤치 아래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담소 중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지나쳐 잔디밭이 잘 조성된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뒤에서 일정하게 들리는 발소리가 나고 잠시 후, 조깅하는 장년의 남자가 앞질러갔다. 그다지 넓지 않은 산책로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한 쌍의 커플과 운동하는 또 다른 두 명의 사람들을 지나쳤다.
  산책로를 도는 동안 주위를 훑었다. 입구에서 담배를 피던 곳 외에는 벤치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의료원 건물로 들어갔다.
  의료 업무를 보지 않는 공휴일인 탓에 1층 로비에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두어 명의 환자와 그들을 면회 온 듯한 손님들, 경비원, 청소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편의점과 오픈형 커피숍은 영업중이었다.
  그녀는 커피숍을 향해 다가갔다. 더위와 갈증으로 인해 아이스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고는 잠시 망설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5,000원이라는 가격 때문이었다. 누구와 만날 명분으로 앉아 있기 위함이라면 모를까 필요 없는 자릿세였다. 앉을 의자라면 수납처 앞에도, 초음파실 앞에도, 건물 중앙을 받치는 둥근 원기둥 아래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돈도 못 버는 게 무슨 5,000원짜리 아이스커피를........
  그녀는 그 자리를 미련 없이 벗어나 수납처 앞 대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5,000원짜리 아이스커피 대신, 자판기에서 800원짜리 캔 커피 하나를 뽑아 마셨다. 원두를 직접 간 향긋한 커피에 얼음까지 듬뿍 넣은 커피 전문점 아이스커피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지만 나름 시원해서 목마름 정도는 충분히 해소할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계속해서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센터를 나온 지 1시간이 조금 넘었다. 조사가 끝나면 전화를 준다고 했는데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걱정 가득한 심정으로 등 짧은 등받이에 허리만 기대앉았다.
  어차피 은제에게 질문할 만한 말은 뻔했다. 아버지가 너에게 어떤 짓을 했니? 아버지가 그 외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니? 아버지에게 싫다는 말은 해 봤니? 아버지의 평소 성격은 어땠니? 처음 상담 때도 말했고, 조사원들이 왔을 때도 말했고, 보호 시설에 가서도 말했을 대답들을 은제는 또 다시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외 그녀에 대해 묻는다면 은제가 어떤 식으로 대답할까. 요즘은 술도 많이 마시지 않고, 싸우는 일도 없다, 이런 대답을 해주길 바랐지만 그들은 대답을 유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술을 많이 마셨다면서? 욕했다면서? 때렸다면서? 지금 말고 그 이전에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만 물을 것이다.
  그녀는 답답한 심정으로 로비를 한 바퀴 돌았다. 화장실도 두 번이나 들렀다.
  상담사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은제가 상담을 받기 시작한 지 3시간이나 지나서였다.
  그녀는 얼른 센터로 달려갔다. 은제는 서류에 사인할 일이 있다고 사무실 안에서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고, 통통하지만 서늘한 표정의 국선 변호사만이 그녀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국선 변호사에게 물었다.

“아이 아빠가 성폭행범이 되는 건가요?”

“지금은 일단 조사만 하는 겁니다.”

“아이 아빠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국선 변호사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요.”

“뭐가요?”

“아이 아빠 조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담당 경찰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했었는데요. 다짜고짜 저를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일삼는 가해자로 몰았습니다. 제가 술 마신 것은 맞지만 아이에게 심한 욕을 한 적도 없고, 때린 적은 더더욱 없는데 말이에요.”

  그녀는 다시 똑같은 변명을 하고 있었다. 누구든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해를 해주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떠들고 싶은 말이었다. 또한 관련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상담을 한 지 한달보름이나 지나서야 신고가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아이가 하지 않은 신고를 아이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거야 저도 알 수 없지만 내부적으로 이게 신고해야 할 만한 사안인지 아닌지를 의논했겠지요. 언제 누가 신고를 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상담교사라는 사람은 아이를 시설에 가라고 부추기는가 하면, 담당 형사라는 사람은 무턱대고 사람을 다그치고....... 고 3인 아이가 한창 공부해야 할 때인데.........”

그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그녀의 편은 아니더라도 법의 엄정함을 따지는 변호사니만큼 과도한 공권력의 개입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해 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변호사는 그녀의 말을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사고유발자잖아요. 애초에 그런 일은 만들지 말았어야지요.”

  사고유발자?! 그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 형사는 그녀를 상습적인 가정 폭력범으로 몰더니 변호사는 그녀를 ‘사고유발자’라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은제와 다투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단어를 선택해야 했을까 싶은 불쾌감이 일었다.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보는 구나, 그래서 저렇게 막말을 쉽게 하는 구나, 하는 노여움도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정말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죄인일지도 모른다고 헛갈릴 정도였다.
  잠시 후, 그녀는 은제를 데리고 센터를 나왔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변호사가 뱉은 ‘사고유발자’라는 말이 끝도 없이 맴돌다가 황 형사가 ‘상습 폭행범’으로 몰았던 장면과 섞여 명치를 짓눌렀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은제가 먼저 말을 걸었다.

“벌써 3시간이나 지났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어.”

“3시간동안 뭘 물어보디?”

“아빠 얘기만 물어봤어. 어떤 행위가 있었나, 구체적으로 어디를 어떻게 만졌냐, 싫다는 의사 표현을 했느냐,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느냐. 딱 4가지 묻더라.”

“4가지 묻는데 3시간이나 걸려?”

“그 경찰 아줌마, 웃겼어. 워드 실력이 너무 형편없는 거야. 하나 물어보고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데만 2,30분씩 걸린 것 같아. 검지 손가락 두 개로 꾸물꾸물. 변호사 아줌마도 답답했는지 계속해서 핸드폰만 보고 있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 사람 불러놓고. 자판 연습이나 좀 하지.”

  은제가 퉁명스럽게 떠드는 동안,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운전대 잡은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명치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무언가 딱딱하고 예리한 것으로 명치를 꾸욱 누르는 것만 같았다. 순간 이대로 죽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운전을 하다가 정신을 잃는 경우도 있다 들었는데 바로 지금 이 순간이구나, 했다.

‘이대로 죽는다면 내 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없어지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불명예를 안고 그냥 가는 거겠지. 해명할 여지도 없이. 은제는.....? 은제는 내가 이렇게 죽으면 아파하기나 할까?’

  하다가 문득 옆 자리에 은제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자신은 괜찮아도 아이까지 함께 죽여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천천히 핸들을 돌려 도로가에 차를 댔다.

“왜 그래?”

  은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좀 힘들어서......”

“어디 아파? 얼굴이 하얘.”

  그녀는 큰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가 뱉고를 반복하며 간신히 말했다.

“요즘 소화가 잘 안 되네. 잠도 잘 못 자고.......”

이번에는 명치를 주먹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두드려줘?”

  은제는 주먹을 쥐고 그녀의 등을 몇 번 콩콩 두드려주었다. 그동안 그녀는 제 오른쪽 엄지손가락과 검지 사이를 눌렀다. 체했을 때 누르는 혈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누르는 시늉만 했는데도 몹시 아팠다. 한참을 그렇게 눌러주고 나서야 좀 살 것 같았다.

“괜찮아?”

  은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응. 이제 괜찮아. 가자.”

“엄마, 병원 가 봐.”

“체한 건데 뭐.”

“그래도.......”

“약 먹으면 돼.”

  그녀는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집에 올 때까지 더는 그와 같은 통증은 없었다. 대신, 큰 알 약을 삼키다가 걸렸을 때처럼 계속해서 갑갑했다.
  집에 오자마자 약통을 뒤져 소화제를 먹었다. 혹시 몰라, 위현탁액도 하나 뜯어 먹었다.
  이후 기진한 것처럼 누워서 잠을 잤다. 머릿속에서 뱅뱅 도는 그녀에 대한 비난들을 반복해서 떠올리면서 그녀는 이야기도 없는 악몽 속을 헤맸다.
  상습 폭행범. 사고유발자. 그들은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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