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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올리기 > 소설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1
four진07-31 00:38 | HIT : 80
21.  가족

  입소시킨 지 이틀 만에 은제는 시설에서 돌아왔다. 재근이 이번 사건에 대해 인지했고, 더 이상 아빠가 무턱대고 찾아오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아이를 설득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수는 은제와 은기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썼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왔고, 아침에 미적거리다가 등교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으면 세수도 안 한 얼굴로 두 아이를 차에 태워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돌아왔다.
  일주일 미뤘던 과외도 다시 시작했다. 은제는 여느 때처럼 학교생활에 열심이었다. 집에 와서는 과외가 끝난 이후에도 새벽 1,2시까지 공부했다. 하지만 평상으로 돌아간 것 같은 평화롭고 정상적인 겉모습 뒤에는 그녀의 불안감이 숨어 있었다. 언제 조사를 받기 위해 불려가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을 이룰 수조차 없었다.
  다시 한 선생에게 전화가 왔을 때는 두 차례나 받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터졌다면 아예 모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별 일은 아니고, 은제가 입소했던 시설에서 입소시 미처 준비해 가지 않았던 나머지 서류를 보내달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한 선생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 번 어머님께서 문자를 주셨죠? 제가 집에 있던 상황이라 어머님 전화번호도 모르고 해서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아닙니다” 했지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한 선생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있었다. 한 형사가 무섭게 겁박하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무사히 입소시켰다는 소식도 전할 겸, 교장 추천서를 통해 알게 된 학교 측에서의 의심에 대해 변명 섞인 장문의 문자를 보냈었다. 그래도 자식을 가진 부모의 입장에서 이해해주는 사람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답장은 없었다. 물론 답장을 바란 문자가 아니었기에 변명이 이해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당시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사용하여 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었다. 발신 전화번호가 찍혔을 텐데 전화번호를 몰랐다고 하는 소리는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물었다.

“은제는 잘 지내나요?”

“예. 지난 토요일에 아이 아빠와 통화했어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상황을 잘 이해하는 것 같았고 아이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은제가 집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묻는 줄 알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런데 한 선생은 바로 말을 끊었다.

“저에게 일일이 말씀하실 필요는 없고요. 시설에서 지난 번 가져가지 않은 서류를 보내달라고 전화가 왔기에 전달하기 위해서.......”

  일일이 말할 필요가 없다? 들을 필요 없다, 듣고 싶지 않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자신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조치를 취했으니 책임은 다했다, 다음에 이와 관련한 어떤 일이 생겨도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렇게 아이를 위하는 척, 보호해야한다며 아득바득 시설에 보내고, 심지어 아이 아버지에 대해 접근 금지 신청을 하라고까지 했던 것 모두 자신들이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
  
“엄마가 걱정된다고 은제가 말했나봐. 그런데 상담교사가 은제에게 뭐랬는지 알아?”

“뭐랬는데?”

“네 걱정이나 해, 그랬대. 그리고 시설에서 나온 것 엄마가 협박한 거 아니냐고 그러더래. 미친 년 아니야? 그걸 그냥 놔둬야 해? 무고죄로 확 쳐 넣어?”
  우진과 만난 횟집에서 그녀는 젓가락 끝으로 애꿎은 광어회만 쿡쿡 찌르며 화풀이 했다.

“아직 조사 안 끝났다며? 지금 터트려봐야 네 손해야.”

“상담교사도 상담교사지만, 그 한 선생이란 사람도 웃겨. 더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이거지. 게다가 황 형사라는 그 담당 형사는 한 술 더 떠. 다짜고짜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드는데 저 인간이 낮술을 쳐마셨나 싶더라니까. 자기네들은 집안에서 싸움도 안 하고 사나봐. 아주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들이라 남의 가정사가 다 불순해 보이는 모양이지? 그 가정이 박살나든 흔적도 없이 사라지든 상관없다 이거지? 대체 그것들이 뭐야? 아무리 법이라고해도 지들이 뭔데 내 가정을 깨려고 난리냐고, 난리가. 미친다, 미쳐. 조사하겠다고 한 지 2주가 넘었어. 오라 가라, 시설에 보내라 마라, 조사 들어갈 테니 꼼짝 말고 기다려라. 피를 말리지, 피를 말려. 생각하면 할수록 열불 나서 목구멍으로 밥이 안 넘어갈 지경이야.”

  우진은 그 와중에도 홀짝 홀짝 그녀의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소주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눈치였다. 요새 계속 명치에 뭐가 걸린 것 같아서 밥을 넘기기 힘들다, 물도 가끔 막힌다, 하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은 탓이리라.

“병원에 가봐. 더 나빠지기 전에. 그러다 큰일 나.”

  그녀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 술은 들어가잖아.”

“그게 들어가는 거야? 마비가 돼서 못 느끼는 거지.”

“아픈 건 뱃속이 아냐. 마음이지.”

  우진은 더는 말리지 못하고 그녀의 빈 잔에 소주를 반쯤 따라주었다. 그 속내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은제는?”

“걱정 마. 당신과 만난다고 했으니 술 한 잔 하겠거니, 할 거야. 처음부터 혼자는 안 마시겠다고, 당신이나 친구 만날 때만 마시겠다고, 대신 또 줄이겠다고 약속을 했거든. 요즘 잘 지키고 있잖아.”

“그래. 잘 하고 있지.”

“한 병씩은 서운하고. 딱 3병. 당신이랑 나랑 각 일 병에 반 병씩 더 먹자. O.K?"

  그제야 그도 피식 웃었다.
  술이 한 잔 들어갈 때마다 그녀는 속에서 끓고 있는 울화를 한 움큼씩 꺼내어 술잔 위에 토해냈다. 그 울화의 용광로 한가운데에 이번에는 은제가 들어앉았다.
“제 엄마, 아빠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놓고 저는 아주 말짱해. 어젠 뭐라고 했는지 알아? 키가 작아서 운동화를 새로 사야겠대. 깔창 안 넣고도 굽 자체가 높은 거라 키가 커보인다나 뭐라나. 운동화 3개나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뒤꿈치가 아프다는 둥, 싸구려라 안 좋다는 둥, 운동화 꺾어 신고 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더니 뒤꿈치가 다 깨져서 그런 것 아니냐고 했더니 사주기 싫으면 관두라고 방으로 쏙 들어가대. 밉다, 밉다. 왜 그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어.”

“애들이 다 그렇지. 나도 그런 적 있어. 새 신발 신고 싶어서 신발 밑창을 바닥에 막 문지르고 엄마에게 졸랐지.”

“난 몰라. 어려서 너무 없이 살아서.”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남들 다 신는 나이키 신발 한 번 사 본 적 없고, 새 신발 사달라고 졸라본 적도 없어. 매일 너덜너덜 찢어진 운동화에, 실내화. 브래지어 두 개 갖고 6년을 버텼어. 중 3 때 담임 선생이 내 실내화를 보더니 그 자리에서 쭉쭉 찢어 버리더라. 애들 다 있는 데서. 지저분한 신발 신고 다닌다고.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 버스 타고 집에 오는 내내 눈물을 한 바가지는 흘렸을 거야. 나라고 새 신발 좋은 줄 몰라서 그러고 다닌 줄 아나? 새 엄마에게 실내화 떨어졌으니 하나 사 달라 소리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런데 쟨 뭐니? 지난 번에 같이 아울렛 갔을 때 봤지? 시험 공부 하느라 고생했다고 옷 사주마 했더니 마구 퍼 담는 것. 백화점도 아니고 아울렛에서 19,900원짜리 옷만 20만원어치 샀어. 난 이 나이 먹도록 1,000원 넘는 팬티 한 장 사 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거 맞지?”

“우리 때와는 다르잖아.”

“백수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 과외비, 용돈 이모가 다 대 주고, 애 아빠가 보내주는 양육비 아껴서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한 다 해 주니까 아쉬운 게 없는 게지.”

“네가 그러고 싶어서 해준 걸 누굴 원망해.”

“그래, 맞아. 해달라는데 못 해주면 마음이 아파. 주머니에 돈 없어도 카드를 쓰든 어떻게 해서든 해줘야 속이 편해. 다 내 잘못이지. 내가 잘못 키웠어. 엄마가 밥을 못 먹고 있는데도 관심이나 있나, 아파도 어디 아프냐고 묻기를 하나. 엄마가 못 해준 것만 기억하지. 사랑하고 희생하면 뭐 하냐? 알아주지를 않는걸.”

  어느새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동안 서러웠던 감정들을 푸고 또 푸고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가 않을 것 같았다.

“애들한테 뭘 바래? 누가 그러더라. 엄마들 사랑은 짝사랑이라고. 나도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지. 얼마나 날 사랑하셨는지...... 난 항상 사고만 치고, 공부도 안 하고 놀러만 다녔는데 그래도 아들, 아들 하셨으니까.........”

“좋겠다, 당신은 그런 엄마라도 계셔서. 난 그런 엄마도 없고, 남편도 없고...... 내가 잘못 산  건지 애들도 그렇고.......”

  우진은 한탄하다 자책하고, 속내 쌓인 불만과 분노를 하염없이 반복하는 그녀의 하소연을 모두 들어주고 위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걱정이 되는지 그녀의 앞 접시 위에 계속해서 회나 반찬들을 얹어주었다.  

“안주 먹어가면서 마셔.”

“봐. 술 들어가니 안주도 잘 들어가잖아. 소화제가 따로 없다니까.”

  정말이었다. 밥도 물도 넘기기 힘들었던 명치가 거짓말처럼 식도를 활짝 열어 술과 안주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술 체질인가봐, 하고 키득대던 그녀가 금세 또 성질을 부렸다.

“잡아가려면 잡아가라고 그래. 애들한테서 엄마 뺏고, 아빠 뺏는 게 공권력이냐?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지. 지들은 아주 고고하게 애들 키우지! 애들이 말 안 들어도 말로 타이르고, 나쁜 짓을 해도 말로 하고....... 그게 가능해? 황 형사, 그 놈은 아마 매일 술 마시고 들어가서 마누라하고 싸우다가 욕하고 지랄 발광을 칠 걸. 안 봐도 비디오다, 그 성질 보면. 그 날도 내 말을 전혀 못 알아듣고 화를 내더라니까. 아침부터 해장술 쳐마신 게 분명해.”

“맞아. 원래 남 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하지.”

  두 사람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횟집을 나왔다. 처음 약속대로 3병을 둘이 똑같이 나눠 마시고 알딸딸하니 기분 좋은 상태였다. 예전 같으면 2차로 더 마셔야 한다고 우겼을 그녀였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취해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조사를 받는 입장이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라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손가락을 건 은제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신고가 들어가기 전부터 지켜나가고 있던 그녀의 다짐이기도 했다.
  상가들이 몰려 있는 골목길에는 다른 가게는 말고 술 파는 식당과 술집만이 불이 켜져 있었다.
  오랜만에 집이 아닌, 밖에 나와서 술을 마시니 밤이슬을 맞으며 술집을 전전하던 젊은 때가 생각났다. 친구들과 둘 혹은 셋씩, 아니면 떼로 몰려다니며 1차, 2차를 이어나가면서도 항상 이상한 건 필름이 끊어져도 집은 잘도 찾아가더란 것이다. 귀소본능이라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그냥 집 외에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가정, 집, 혼자 살든, 가족 중에 싫은 사람이 있든 간에 각자 누울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내가 사는 집, 내가 눕는 방, 이불, 베개....... 아이들의 집착 인형처럼.  

“안 그래, 우진씨? 귀소 본능 말이야. 난 집에 새엄마가 있어서 싫었는데도 기어코 그 집엘 들어가고 있더란 말이지.”  

  곰곰이 듣고 있던 우진이 불쑥 아이스크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 보니 그는 각기 다른 5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골라 주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5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이 함께 담긴 아이스크림 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애들 좋아하잖아.”

  그는 그녀를 빌라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돌아가려고 했다. 그녀가 그의 팔을 잡았다.

“집에 가서 아이스크림 같이 먹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은제 보기 민망해. 너랑 나랑 하는 그 소리 들었다며? 조심해야지.”

  은제가 상담교사를 비롯한, 경찰, 기관들에게 전달했다는 그 얘기, 엄마와 아저씨의 섹스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그 말을, 아이가 받았다는 그 충격을 그는 걱정하고 있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은 나랑 섹스하려고 만나는 거야?”

그가 펄쩍 뛰며 인상을 썼다.

“그런 소리가 어딨어?”

“그럼 들어가. 그리고 당당해지자. 나랑 당신 불륜 하는 거 아니고, 좋아해서 만나는 거잖아. 내가 변태라서 아이 귀에 일부러 그 소리 들려준 것도 아니고, 운 나쁘게 걸린 것 뿐이니까 앞으로 당분간 안 하고 조심하면 돼. 그리고 은제도 알아야 해. 엄마도 엄마의 인생이 있다는 것.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언제 이별할 지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는 애 아빠 없는 자리에서 우리 애들 예뻐해 주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결혼 안 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녀는 진심이었고 간절했다. 은제도 그런 엄마의 의지를 알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아이도 이해하라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줄 참이었다. 더 이상 아이 앞에서 죄인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 또한 그녀의 진심을 이해한 듯 피식 웃었다.

“언제 이별할지 모른다고? 언제고 헤어질 생각 하고 있는 거야?”

  그녀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당신은 4녀1남 중 유일한 남자고, 집안의 가장이고, 2대 독자야. 언제고 좋은 여자가 생기면 결혼해서 애를 가져야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말려? 떠난다고 하면 보내줘야지. 내가 무슨 염치가 있어서......”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야단을 치듯 그녀의 말을 끊었다.  

“바보 같은 소리 또 한다. 알았어. 그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들어가자, 들어가.”

  우진은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은제는 제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은기는 게임하느라 잠자야 할 시간을 훨씬 넘긴 상태였다.
  그녀는 두 아이를 식탁 앞으로 불러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었다.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에 숟가락 네 개를 꽂고 누가 더 많이 먹나, 누가 더 맛있는 맛을 차지하나, 숟갈 네 개가 전쟁을 벌였다. 특히 은기는 자기가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맛 부분을 두고 우진과 숟가락을 부딪치며 다퉜다.

“내 거에요.”

“내가 샀잖아.”

“내가 좋아하는 거에요.”

“나도 먹을 거야. 가위바위보 하자. 이긴 사람이 한 입씩 먹는 거야.”

“그게 어떻게 한 입이에요?”

“그럼 너도 이기면 되잖아.”

  우진은 은기의 눈높이에서 똑같이 놀아주는 사람이었다.
  사실 처음 일 년 동안 은기의 우진에 대한 적대감은 대단했다. 그가 그녀와 단 둘이만 있으면 방으로 쫓아와 그녀를 끌고 나갔고, 그가 장난으로 건들기만 해도 왜 때리냐며 화를 냈다. 싫다고 울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거나 섭섭해하는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말을 시키고 장난을 걸었다. 맛있는 것은 은기 입에 먼저 넣어줬고, 물놀이를 가서는 기운이 달린다면서도 지칠 때까지 놀아주었다. 결정적으로, 은기가 가장 좋아하는 휴대폰 게임을 제 휴대폰에도 깔더니 집에 놀러올 때마다 함께 놀아주었다. “한 판 붙을까?” 하면 은기는 신나서 휴대폰을 들고 달려왔다.
  그 때부터였다. 은기는 우진이 오는 날만 기다렸다. “아저씨, 언제 와?” “아저씨 오라고 해.”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꼭 아저씨라 부르면서도 은기의 마음에서 적대감이 사라지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엄마, 나 잘래.”

  그 사이 은제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갔다. 기색을 살폈지만 그다지 불편해 하거나 싫은 기색은 없어보였다.
  잠시 후, 은기도 졸린 지 이를 닦자마자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엄마 나랑 잘 거지?”

“그래야지.”

“아저씨는 어디서 자?”

  그 소리에 우진이 얼른 말을 받았다.

“나 은기랑 잘 건데.”

“셋이? 그럼 끝말잇기 하자.”

  은기는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 한가운데에 벌렁 누웠다. 은기를 사이에 두고 우진은 벽 쪽에, 현수는 바깥쪽에 누웠다. 덩치 큰 성인 둘과 아이 한 명이 나란히 눕기엔 퀸 사이즈 침대가 비좁았다. 우진이 벽에 등을 대고 모로 누워서야 사이에 낀 은기에게 다소 넉넉한 자리가 확보되었다.

“내가 먼저 할래. 자전거.”

“거위.”

“위선자.”

“자린고비.”

  어느새 은기는 제 차례가 되어도 답을 내지 못했다. 곤히 잠 든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렸다.
  그녀는 삐뚤어진 은기의 베개를 바로 잡아 주고는 그의 불편한 자세가 미안해서 일어나려고 했다.

“어디 가?”

“좁잖아. 내가 은기 방에서 자려고.......”

  그의 손이 은기의 배를 넘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매끈하고 따뜻한 큰 손이었다.

“괜찮아. 안 좁아.”

  그는 은기가 답답해할까봐, 잡은 손을 머리 위로 넘겨 아이가 베고 누운 베개 위에 얹었다.

“자자.”

  두 사람은 그렇게 아이를 가운데 끼고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잠깐 아이의 뒤척임에 그녀는 잠이 깼다. 그의 큰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감싸고 있었다.  

“고마워.”

  그녀는 그의 엄지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답이라도 하듯 그의 손이 다시금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가 풀렸다. 그녀는 오랜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근래 더욱 잦았던 가위 눌림도 없었고, 세상에서 한꺼번에 쏟아내는 질타도 더는 두려울 것 같지 않았다. 누가 뭐라던 두 아이가 있었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또 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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