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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방문
신외숙 ( HOMEPAGE )04-25 14:20 | HIT : 249
두 번째 방문


신외숙


어릴 적 만화책에 타임머신이란 비행 물체가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 여행하며 겪는 각종 사건을 스토리로 엮은 것인데 여간 흥미진진한 게 아니었다. 10년 전엔가 별에서 온 그대나 옥탑방 왕세자도 그와 비슷하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펼쳐지는 영상은 환상적이면서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우연의 일치에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현재와 과거의 차이는 단연코 신분(身分)이었다. 시대(時代)가 바뀌면서 신분의 차이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린 나는 타임머신이란 기계가 정말 존재하는 줄로 알고 날마다 상상의 날개를 타고 다녔었다. 만화 속에 나오는 타임머신은비행기 형체를 지닌 것인데 하늘에 뜨기만 하면 시간이 광속으로 날아 과거의 현장에 가 머무는 것이었다.

그러다 위험이 닥치면 일정 장소로 피신하는데 거기에 타임머신 기계를 타고 다시 현재로 귀속하는 것이다. 어릴 때 어린이 신문에서 보았던 타임머신이란 만화는 나의 상상력을 극도로 발전시켰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별에서 온 그대나 옥탑방 왕세자도 그랬다.

수백 년 간의 세월을 하나로 압축시키면서 펼쳐지는 드라마인데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우연과 인연에 시청자는 가슴 졸이며 절규했었다.
누구나가 말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현재에 집착하라.
또 누군가는 말한다.
앞 뒤 돌아 볼 길 없이 앞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건 곧 과거나 미래를 생각할 겨를 없이 현재만 보았다는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멘트가 있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내게 남은 게 무엇인가. 미래가 안 보인다는 말도 한다. 굳이 따지자면 과거보다는 현재가 현재 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는 현재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현재를 조종하는 일등 공신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구나 할 것 없이 노년에 이르면 과거를 회상하고 한번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유투브에는 추억이라는 동영상이 인기를 타는 모양이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타임머신도 없이 간단하게 클릭 한번만으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니. 내 나이 이순(耳順)에 이르다 보니 나도 수시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며 회한에 젖는다. 나는 7080세대 베이비 붐 세대다. 그래서 수시로 70-90년대 동영상을 클릭한다. 내 젊은 날의 방황과 추억어린 날들을 되새기며 현재와 미래를 다지기 위해서다.

객지의 하늘은 드높았다.
블루 하늘이 척박한 읍내 거리와 시골 장터를 흰 뭉개구름과 함께 뒤덮고 있었다. 가끔씩 헬기도 날아다녔고 한산한 도로에 도내버스만 오갔다. 보편화 된 군 개혁의 일환으로 직격탄을 맞은 읍내는 폐업한 상가만이 즐비했다. 쓸쓸함과 황망함. 아릿한 슬픔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내 젊은 날의 방황이 한꺼번에 가슴속을 치받고 살아났다. 과거는 늘 후회를 동반한다. 왜 그때 성실하게 살지 못했을까. 좀 더 지혜롭게 처신했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절대자 앞에 내려놓고 심사숙고 했더라면. 끝없는 자책이 녹음기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린 나는 지인(知人)와 함께 전통 시장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높은 차양이 쳐진 시장은 몇 군데 빼놓고 대부분 폐업된 상태였다. 사람들의 발길이 모이지 않는 걸로 보아 죽은 시장 같았다, 오일장이 서면 달라지겠지만.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얼마 안 남은 토착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는 걸까. 그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과연 어떤 걸까. 군청 앞에 인공폭포가 보였다. 물줄기가 마른 걸로 보아 가동이 끊긴 지 오래 된 것 같았다.
그래도 군내에 초중고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아직까지는 상존하는 인구가 많은 모양이다. 고층 아파트도 몇 동 보였다. 이 퇴락한 군(郡)에 아파트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지난번보다는 설레임이 확실히 덜했다. 혹시나 옛날의 지인(知人) 만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덜했다.

“이곳이 정말 선생님 소설에서 읽었던 것처럼 삭막하긴 하네요, 시골 같은 분위기도 별로 없고 왠지 쓸쓸하고 그러네요. 옛날에도 그랬나요?”
지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읍내 거리를 한바퀴 둘러보면 반드시 군복 입은 군인이 보였다. 다만 옛날의 녹색 군복이 개구리 군복으로 바뀌었을 뿐. 이젠 군 문화도 많이 개선되어 저녁 6시 이후면 외출도 가능하다니 옛날 같았으면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다.  

거리는 이따끔씩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지나갔다. 물론 옛날에 비해 화려한 문양의 복장이었다. 그들은 책가방을 등에 진채 삼삼오오 PC방이나 오락실로 향했다. 주변의 음식점을 둘러보던 지인과 나는 유명하다는 떡볶이 전문점으로 들어섰다.

보수(保守) 발언으로 엄청난 후환에 시달린다는 분식점이었다. 깨끗한 내부 구조에 생각보다 메뉴가 다양했다. 40대로 보이는 주인 여자는 친절하고 어딘가 세심한 듯 보였다. 처음 보는 손님에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며 우리가나누는 대화에도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눈치였다.

떡볶이의 종류도 다양했다. 국물 떡볶이 잡채 떡볶이 치즈 떡볶이, 어묵 떡볶이 라볶이, 마요라는 새로운 메뉴도 등장했다. 즉석 컵밥인 셈인데 각종 부재료를 넣고 소스를 뿌려 완성한 간단한 먹거리였다. 라면의 종류도 다양했다. 라면에다 여러 가지 첨가물을 넣어 끓인 라면은 연령층과 관계없이 인기 메뉴였다.

우리는 치즈 떡볶이에다 잡채 떡볶이를 추가해 시켰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서울에서 흔히 맛보던 고추장 특유의 텁텁함이 없고 대신 달짝지근하면서 깔끔한 맛이 있었다. 단무지 등 여러 가지를 추가해 시키는 데도 여주인은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서울과 달리 정말 맛있다. 그치? 재료를 좋은 걸로 썼나봐.”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정말 맛있네요. 이런 맛 처음이에요, 또 오고 싶네요”
지인은 여주인을 향해 아부성 발언까지 했다.
“이곳이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 땅이었대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국군이 이 땅을 빼앗아서 우리 소유가 된 것이고 개성 쪽은 우리가 북한에게 뺏긴 거고요, 내가 이곳에 근무할 때만 해도 여기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 몰라요, 보안부대가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주민들이 신고하기로 되어 있었고 가을이면 특수 훈련이 시작돼 대포 소리에 잠도 못 이룰 정도였어요, 얼굴에 검정 칠을 한 군인이 갑자기 볏단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는 말하다 말고 한숨을 폭 쉬며 말했다

“참 세월도 빠르지 벌써 36년이나 지났네요.”
주인 여자는 계속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내 얼굴을 자꾸 쳐다봤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선생님 저 주인 여자가 선생님을 아는 눈치에요. 자꾸만 쳐다봐요.”
나 역시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전혀 낯선 인상이었다.
“혹시 그때 학교에 근무했을 때 학생이 아니었을까 잘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어릴 때 모습이 남아 있을 텐데 전혀 낯선 얼굴이에요.”
“옛날에는 여기를 두고 감자바위라는 말이 유행 했었는데.”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옛날에는 식이다. 지금 나는 추억 여행을 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여행은 시간 여행이자 추억 여행인 셈이다. 유투브를 열면 추억의 영상이란 코너가 있는데 시간 여행자 time traveler란 부제가 붙어 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모여 진한 소주잔을 기울이며 월급쟁이의 애환을 나누는데 그렇게 애잔할 수가 없다.

희생의 대표격인 베이비 붐 세대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경제 대국을 위한 견인차가 되었지만 이젠 퇴물처럼 되어 버렸다, 봉제사에다 부모와 가족을 책임지고 뼈빠지게 일했던 그들은 노년에 와 찬밥신세가 되었다. 황혼 이혼이 는데다 병든 남편을 식충이라 하여 아내들이 멸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고령층의 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건 죽은 남편의 연금을 꼬박 꼬박 타먹으며 사는 과부라는 것이다, 참 야박한 세상이다. 돈이면 다라는 식이다. 따라서 60대 70대로 보이는 여자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단체 관광에 나서는 것도 다 이와 무관한 것이 아니리라.

모든 게 유투브로 통하는 세상이다. 굳이 여행길을 나서지 않아도 유투브만 열면 30-40년 전으로 얼마든지 추억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가일층 발전된 세상은 세월마저 단축시켜 버린 느낌이다. 예전에는 몰랐었다, 내 부모 세대가 유행가 대신 흘러간 가요를 좋아하는 이유를. 내가 젊었을 때는 7080 노래가 유행이었다. 그 이전에는 남진 나훈아 송골매 조용필 이선희 같은 가수가 TV 화면을 다 차지하다시피 했었다.

그런데도 내 부모 세대는 굳이 김정구의 두만강 흥남부두를 좋아했다. 그 이유를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송골매 배철수가 진행하는 7080 콘서트를 보면서, 내가 대학 다닐 때 로망이었던 배철수는 환갑을 훨씬 지나 66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애인의 팔짱을 끼고 명동 육교를 걸어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대학가를 휘몰아쳤던 대학 가요제와 해변가요제도 떠오른다. 그때 성공한 가수들은 현재도 스크린을 누비고 다닌다. 학교에서 노래깨나 한다던 친구들은 모두 대학 가요제에 나가고 싶어 환장했었다. 정태춘의 촛불을 부르며 눈을 지그시 감던 민자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가수의 꿈을 일찌감치 접었다.

남편이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몇 년 후엔가 유행했던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를 부르며 눈물짓던 내 모습도 생각난다. 아! 그때 내게 눈물 나게 했던 그는 30년도 전에 하늘나라 시민이 되었다.  
나는 지금 내 나이의 삼분의 이를 거슬러 여행하고 있다. 정확히 내 이십대 중반에 잠시 머물렀던 이곳에서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해매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이 육십 대에 들어섰으니 인생의 마무리를 위해 결자해지 하고 싶은 심정이랄까. 내가 이곳을 그리워할 때마다 남편은 말했었다.

“나도 거기 한번쯤 가보면 안 될까?”
그때마다 나는 결사반대 했었다.
“집에서 그냥 TV나 보셔, 배고프면 라면이나 끓여 드시던가.”
“흥 무슨 비밀단지라도 숨겨논 모양이지. 아니면 옛 애인이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던가.”
“그랬으면 더더욱 좋고.”

사람이 가장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흔한 맛집 순례나 여행말고 또다른 게 있다면 추억여행이 아닐까. 비둔해진 몸집으로 쇼핑을 즐기던 시절도 다 지나가버렸다. 유난히 약해진 관절이 순간마다 통증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행을 멈출 수는 없는 일. 그 대신 나는 유투브에 나오는 것처럼 시간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나의 젊은 날의 흔적을 찾아 회상에 잠기면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감정의 실마리를 찾고 싶어서다. 그 이면에는 어떤 보상심리가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여행을 위해 서둘렀다. 여행은 언제나 설렘으로 시작된다. 집을 나서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

후회와 가책, 연민과 끝도 없는 아픔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전철 역사를 향해 걸어가던 나는 지인(知人)에게 카톡을 보내 약속을 취소했다. 그리고 행선지를 춘천으로 바꾸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길이다. 용산역에서 경춘선 ITX 열차로 바꿔 탔다.
지하와 지상으로 연결된 급행인데 느낌은 일반 열차나 별다르지 않다. 서울을 벗어난 열차는 녹색 산야를 지나 어느새 강가를 지나고 있다. 여행은 힐링 자체다. 세파와 분노에 찌든 가슴을 일시에 평안으로 환기시켜 준다. 전동차가 진행하면서 자연풍광은 낭만으로 치유 단계로 접어들었다.

30년 전만 해도 성북역 지금의 광운대역에서 출발하던 경춘선 열차가 지금은 상봉동에서 춘천까지 굴을 여러개 뚫어 거리를 단축시키면서 바깥 풍경 재미는 덜해졌다. 깜깜한 굴속을 여러번 지나가기 때문이다. 청평 가평 강촌을 지나면서 대학시절 때 과 친구들과 MT온 기억이 떠오른다.

아! 그때 내게 가난은 숨길 수 없는 뇌관과 같았다. 비굴함과 수치심으로 난 늘 현실을 떠나고 싶어했다. 이과(理科)가 전공인 나는 애초부터 적성이 맞지 않아 전과(轉科)를 생각하고 있었다. 과 친구들이 공주 신분이라면 난 시녀 같았다. 내 몸 구석 구석에서 궁기(窮氣)가 흐르고 있었다.

힘들게 알바한 돈으로 큰 맘 먹고 비싼 옷을 사 입어도 여전히 궁기가 흘렀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몸과 마음이 가난에 치여 저절로 비굴해졌다. 그건 내게 항상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가난으로 인한 멸시와 수모 앞에 난 늘 멘붕 직전이었다. 늘 자신감이 없어 망설이고 그런가 하면 한편으론 분노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학 입학 후 처음 떠나보는 MT였다. 원색 계통의 등산복으로 차려입은 과 친구들은 하나같이 미모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 빼놓고 모두 빼어난 미모였다. 게다가 집안마저 유복해 유명 브랜드 옷 아니면 걸치지도 않아 패션 감각마저 있어 모델 같은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강촌에서 산길을 따라 걷다가 유스호스텔에서 모 대학 공대생들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나는 모처럼 사 입은 등산복이 왠지 모르게 싼티가 나는 것 같아 여간 주눅 드는 게 아니었다. 또 등산화가 발가락이 꼭 조이고 불편해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공연히 와 가지고 생고생을 하네.”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시원한 폭포가 산 계곡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 장관(壯觀)이었다. 태어나 처음 구경하는 자연 경관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 너무 멋있다. 내 생전 이런 멋진 광경은 처음 본다.”
곁에 서 있던 과 대표 민경이가 말했다.
“저렇게 좋아할 거면서 왜 그동안 MT는 안 따라 온 거니?”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경숙이가 말했다.
“쟤는 알바하기 바쁘잖아. 공부하러 대학 들어온 건지 알바하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라니까.”

내가 옆에서 듣고 있는데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 역시 남의 이야기 듣는 것처럼 그냥 넘겨버렸다. 나는 자존감도 낮았고 비굴했다. 그게 내가 살아남는 법이라고 내 집안에서 무언중 가르쳤다. 뼈에 사무친 가난은 조상대대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내 집안에선 저녁 6시가 넘으면 아무리 어두워도 전깃불을 못 켜게 했고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또 밖으로 나도는 걸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교통비 때문이었다.

“차비 없애고 돌아다니지 말고 집구석에 가만히 엎드려 있어라.”
군것질이나 친구들과의 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끼니를 거르지 않고 누울 잠자리만 있으면 괜찮다고 입만 열면 이야기했다. 아무리 죽을만큼 힘들어도 내색하면 안됐다.
몸에 심각한 질병이 발생해도 병원에 가기 보다는 돈 걱정에 화부터 냈다. 영양실조에 뼈가 휘고 빈혈이 발생해도 원인조차 알려 하지 않았다. 무관심과 방치 속에 어린 시절이 흘러갔고 나는 겨우 언니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언니 역시 하는 짓마다 궁상을 떨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아픈 몸을 이끌고 직장에 출근했고 온갖 수모를 받으면서 돈벌이에 매달렸다. 자기를 위해서는 옷 한가지 못 사 입으면서 동생들한테만큼은 아낌없이 돈을 쾌척했다. 언니의 학력은 중졸이었다.
중졸의 학력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야 뻔하지 않은가. 직장을 다닌다기 보다 잘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 같아 어린 내 눈에 비친 언니의 모습은 늘 풍전등화였다.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졌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건 가족들은 언니를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력이나 직장은 그렇다 쳐도 외모가 너무 못생겼다는 이유였다.

여자의 생명인 외모가 너무 추레했고 늘 비굴하고 자신감이 없어 주저주저 하는 모습이 남들에게 천대받기 꼭 알맞았다.
또 지능지수는 얼마나 낮은지 눈치코치도 없고 말실수도 자주해 구박을 자처하고 다녔다. 그러한 언니에게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기쁨은 바로 나였다. 내 밑으로 남동생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일찌감치 공부에는 뜻이 없어 고졸로 마치고 말았다.

그것도 간신히 졸업이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고 각기 적성을 찾아 밥벌이는 잘하고 다녔다. 나는 그러한 집안 속사정을 과 친구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그들은 절대 이해 못할 것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졸업 이후에 있었다. 취업을 하느냐 결혼을 하느냐.
나는 순간적으로 전공을 잘못 선택하는 바람에 대학 4년 내내 엄청난 고생을 했다. 화학 물리는 애초부터 내 적성과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과(轉科)를 하거나 재수를 할 형편도 되지 않아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겨우 학점을 취득해 간신히 졸업했다.

국가고시 시험도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합격했고 지방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간신히 취업에 성공했다. 그것도 임시직이었다. 나중에 정규직으로 변환 되었지만 공무원이라는 자존심 하나만으로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지방 그것도 벽촌에서 근무하는데 대졸 출신은 나 포함해 4명이었다.

나만 보건직이고 나머지 세 명은 행정직이었다. 인생 고비 고비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는 저력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한때 유행했던 헝그리 정신이었다. 객지에서의 직장생활은 순간마다 파도타기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 주변도 없고 임기응변은 더더욱 할 줄 몰라 이미 직원들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좁은 군(郡) 소재지는 발 없는 소문이 늘 천리마처럼 날아다녔다. 날마다 서울이 그리웠다. 사방을 둘러봐도 논밭과 군복만 보이는 풍경도 지칠만큼 싫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공무원만큼 안정된 직장은 없었다. 비록 박봉이었지만 두 달에 한번씩 나오는 600퍼센트 상여금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떠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어느날 남편이 나타났다.

그는 내가 대학 2학년 때 대학 미팅에서 만난 파트너였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CC는 아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여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까지 마친 상태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대가 아니었다.
정규 자격증만 있으면 공무원이든 기업이든 취업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무원보다 급여가 세 배가 많은 기업체에 취직했다. 나와 달리 친화력이 좋아서 입사하자마자 날개를 달고 승진을 거듭했다. 그리고 나를 볼 때마다 그 형편없는 공무원 당장 때려치라고 성화가 대단했다.

36년 전 일반 공무원 초봉이 11만원이라면 일반 기업체 직원은 30만원이었다. 또 당시는 맞벌이가 흔치 않아 여직원은 결혼과 동시에 퇴사가 기본이었다. 나도 그 흔한 절차를 따라 그 척박한 객지를 떠나왔다. 결혼 전 남편이 내가 근무하는 군청에 와서 내 직속 상사에게 인사 하겠다고 여러번 졸랐지만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결혼하기 두 달 전 이미 퇴직서를 제출했고 결혼식에도 친한 직원 몇 명만 참석하는 걸로 끝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객지와의 인연은 끝난 걸로 알았다. 문제는 내가 소설가로 등단하면서부터다. 내 소설 속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객지에서 만났던 마을 사람들이 많았다.

지명은 이니셜로 표현했고 작중 인물도 프로필을 변경했지만 캐릭터는 전혀 고치지 않았다. 특히 내가 상처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팩트에다 허구까지 덧붙여 한풀이를 했다. 각인된 상처는 세월이 흘러도 전혀 마모되지 않고 재생산 되었다. 일상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난에 대한 치명적인 아픔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친 절약으로 비웃음과 수모를 자처했다. 난 어쩌면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어두운 기억을 붙잡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DNA에 의해 무수한 명령과 조종을 받으며 집착의 끈을 이어 왔는지 모른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작중 인물과 함께 끊임없이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는 10년 전으로 시작했던 문구가 20년으로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30년 36년까지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드디어 타임머신을 타고 옛적 내가 기거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무언가 내 가슴 속에 두려움이 남아 있었던 걸까. 동서울 터미널에서 지인(知人)과 함께 ○◯로 떠나는데 그야말로 감개무량이었다. 미리 준비했던 모자와 선글라스는 가방 속에 숨겨둔 채 꺼내 쓰지 않았다. 차창 밖을 보는데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다. 2월이었다. 서울 날씨는 비교적 포근했지만 막상 ○◯에 내렸을 때 추위는 온몸을 감싸듯 다가왔다.

마치 35년 전처럼. 버스터미널 주변은 예상대로 전혀 낯선 군(郡) 소재지였다. 상가는 오밀조밀하게 이어졌지만 이미 폐업한 곳이 더 많았다. 오래 전에 새로운 도로가 뚫리면서 상가의 폐업은 이미 기정된 사실이었다. 35년 전 소양호를 둘러서 가던 도로가 산에 굴을 뚫어 2시간이나 단축시키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소양강에서 쾌속선으로 출발하던 수상 교통편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착장이 폐쇄된 지 이미 오래 됐다. 따라서 상권(商圈)이 거의 전멸 상태였다. 모래 흙먼지 날리던 도로는 아스팔트로 변했고 읍내 거리도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데다 편의점과 모텔이 들어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했다.

아직도 아날로그식인 시외버스터미널을 나오니 곧바로 상가가 나타났다. 원두커피 전문점과 폐업한 모텔과 음식점들이 굳게 다문 자물쇠와 함께 눈길을 끌었다. 상가 맨 끝에 군인백화점이란 상호가 보였다. 요즘 군대 식당은 예전과 달리 신세대 사병들의 기호를 위해 영양사가 특별식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굳이 일반 음식점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부대로 들어갈 때도 일반버스가 아닌 군용 버스를 이용해 군인들의 모습도 이따끔씩 보였다. 그래서인지 도내 버스는 일반버스라기 보다 마을버스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승객 역시 엄청나게 줄어든 탓이리라. 예상대로 관공서도 산뜻한 신축건물로 변해 있었고 주변에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5일마다 장이 서던 시장도 시멘트로 도배를 했는데 문을 연 곳은 몇 안 되고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전통 시장으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 인공폭포가 보였다. 겨울이라 가동을 안 해서 그런지 더 을씨년스럽고 삭막했다. 내가 자주 출장을 나가던 면(面)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 때였다.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서는 발걸음이 있었다. 발그림자가 큰 걸로 보아 남자 같았다. 가슴 속에서 쾅! 소리가 났다. 그림자는 약간 비틀거리고 있었고 불길한 예감이 먼저 가슴을 덮쳐왔다. 자세히 보니 신발은 군화(軍靴)였다. 반짝 반짝 윤이 나 있었다.
군화가 내 앞으로 한걸음 더 다가서더니 말했다.

“저 윤석호 중위 어머님 아니신가요?”
“네에?”
순간, 어둠이 걷히고 마음속에 적요(寂寥)가 찾아왔다. 그렇다면?
“아! 김성순 중위?”
이곳에서 김성순을 만나다니, 우연치고는 참 기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마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아들 석호의 대학 친구였다. 어깨에 중위 계급장은 사라지고 대위 계급장이 보였다. 둘 다 학사장교로 복무했는데 아들은 전역을 했고 김성호는 그냥 군대에 말뚝을 박은 것 같다.

아무래도 취업난을 뚫을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아직 제대 안한 모양이구나.”
나는 알면서도 일부러 애둘러 말했다.
“네, 저는 그냥 직업군인으로 남기로 했습니다.”
“경쟁률이 엄청 났을 텐데 성공했구나.”
“그보다도 제 고향이 바로 이곳입니다.”
“그래?”
전혀 뜻밖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일부러 남기 위해서 전역을 포기한 것인가.  “석호가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공이….”
“석호가 말 안 하던가?”
“네.”
“신학 공부하러 간 거야. 그애 할아버지의 유언이었거든.”
“외할아버지요?”  “아니 친할아버지.”
“저는 불교 집안이라.”
김성순은 잠시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심한 듯 물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유명한 작가분이라고 맞습니까?”
그때였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던 지인(知人)이 말했다.
“네 선생님께선 유명한 작가분이세요. 전 선생님 추천으로 등단했고요.”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다.”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그만하라는 표시로 팔을 세게 잡고 흔들었다.
“아! 그건 말이죠. 선생님께서 예전에 이곳에 근무하시던 직장이….”
순간 나는 그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눈치도 없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젊었을 때 이곳 근처에서 근무하셨단 말이죠.”
나는 더 세게 그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쓸데없는 소릴 왜 자꾸 하는 거야?”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그럼 군 복무 잘하고 어른들도 잘 모시고 좋은 일 있기를 바래, 우리 석호 나오면 그때 또 봄세.”
“네 어머님, 그럼 안녕히 가시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김성순은 자세를 가다듬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충성!”
거수 경례를 부치더니 군청이 보이는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어느 집 아들인지 차암 잘 생겼다.”
지인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아까 왜 자꾸 저를 꼬집었어요?”
“쓸데없는 소릴 자꾸 하니까 그렇지.”
“그게 왜 쓸데없는 소리에요? 이곳에서 근무하실 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녀는 얄밉게도 계속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오랫동안 가슴 속 깊이 응어리져 있던 사건이 화산처럼 떠올랐다. 35년 전 이곳에서 근무할 때 유난히 내게 시비를 걸고 넘어지던 상사가 있었다. 춘천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그는 별명이 집게벌레였다. 그는 유난히도 타인의 단점이나 약점을 재빨리 파악해 이간질과 갑질 하는데 선수였다.

그는 다른 곳으로 전출도 가지 않고 계속 머물렀는데 ◯◯가 고향 토박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입만 열면 말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 출신은 오직 자신뿐이었다고. 그래서인지 그의 부모는 절대 고향을 떠나지 말고 뿌리를 박으라고 단단히 다짐을 했다고 한다.
겉으로는 순박해 보여도 그는 모사꾼이었다. 동료들 중 제일 먼저 승진을 했고 툭하면 부하직원 눈물 빼기에 바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바로 나였다. 그가 걸핏하면 내뱉던 말이 떠오른다.

“아니 얼마나 능력이 없으면 여기까지 왔대? 서울에 들어갈만한 직장이 그렇게도 없었던가? 대학 다닐 때 학점이 영 형편없었던 모양이네.”  그러자 옆에 있던 또다른 직원이 말했다.
“그것도 정규직이 아닌 임시직 아닙니까?”
비굴한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져도 말 할 수 없었다. 공연히 말실수 했다가 밉보여 불이익 당할까 두려웠다. 당장이라도 사직서 내고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간 가족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데 될 테니까.

말끝마다 돈! 돈! 하면서 자식들한테 온갖 한풀이를 하던 내 부모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내 안위나 아픔보다 돈 문제가 더 시급했다. 돈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고 또 사랑했다. 돈에 대한 원한이 깊은 만큼 돈을 더 의지했다.  
언니가 직장 다니면서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해도 가족들은 오히려 가해자를 편들었다. 세상은 원래 다 그렇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무능력을 모조리 자식들 탓으로 돌려보내고 분풀이하기에 바빴다. 한마디로 내 집안은 난파선이었다. 깨질대로 깨진 마음이 모여 상처받은 원한만 가득했다.

대물림 된 상처는 서로를 향해 네 탓만 하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가족 중 유일하게 대졸 출신이었다. 언니의 피땀 어린 희생으로 따낸 대학 졸업장을 두고 가족들은 만날 때마다 내게 대가(代價)를 요구했다. 그런 집안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는데 그러니까 객지는 내게 일종의 피난처인 셈이었다.
가족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피할 수 있는 안식처, 그런데 그게 바로 독(毒)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근무한 지 1년 만에 나는 정규직으로 전환 되었다. 호봉이 약간 오른 것 말고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직원들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내 몸에서 흐르는 궁기(窮氣)가 내 비굴한 태도가 그런 결과를 불러 왔는지 모른다. 다만 나는 생존이 급급했는지 모른다.
직장생활에 염증이 날수록 내 안에 악감정은 높아만 갔다. 분노 조절이 안 되자 어느날인가부터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비굴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자 멘붕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 이면에는 가난에 대한 뼈아픈 기억과 돈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었다.

돈에 대한 비굴함, 그건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돈 때문에 당하는 수모와 멸시를 받아들여야 하는 치명적인 슬픔을. 돈 때문에 방치되고 온몸에 궁기가 흐르는 치욕을 당해야 하는, 저주스런 아픔을. 단돈 몇푼 아끼겠다고 온 시장 바닥을 다 휩쓸고 다니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이런 치명적인 가난의식에서 나를 구해준 건 남편이었다. 그는 나와 달리 단돈에 집착하지 않았고 대범하고 침착했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인물타령도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가치관이 달랐다. 현재보다 미래를 더 중시하는 게 그의 사고방식이었다. 눈앞의 단순한 이익 때문에 미래를 그르칠 수 없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과거를 따지지 않고 사람을 편견없이 대하는 바람에 판단착오와 손해가 있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단돈 몇푼에도 벌벌 떠는 내게 이젠 그만 과거와 이별하라는 말에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돈에 인색한 내가 아낌없이 투자하는 곳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외아들 석호였다.
석호는 시댁의 4대 독자였다. 시아버지는 손주를 목사로 만드는 게 꿈이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해 밀어 붙이려니 불상사가 잇따랐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미리 김칫국부터 마셔대니 얼마나 기가 막힐 노릇인가. 나도 아들도 결사 반대였다.

아들은 군대를 마치면 곧바로 기업에 취직해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까다로운 교인들 비위 맞춰가며 억지로 거룩한 성직자 흉내 내며 사는 건 체질 상 맞지도 않고 싫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왜 편한 길 두고 그 힘들다는 십자가의 길을 가라고 강요한단 말인가.
내 눈에 비친 목회자는 가난 아니면 위선 명예 아니면 추락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석호가 말했다. 밤마다 꿈에서 십자가가 보이는데 마음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어느날, 특공훈련을 마치고 나오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아무래도 신학을 해야겠어, 할아버지가 기도를 엄청 세게 하신 모양이야.”
시아버지는 기도 응답이라며 미국유학을 권했고 아들은 순순히 따랐다.

“요즘은 목사도 스펙이 있어야 해, 외국 가서 박사학위 하나쯤은 가져야 교인들에게 무시를 안 당한단다.”
너무 기가 막혔지만 아들은 의외로 순순히 따랐다. 결혼한 지 십 년 만에 얻은 귀한 외아들이 유학길에 오르자 견딜 수 없이 허전했지만 신적능력이 통했는지 얼마 안 가 안정이 되었다. 소설에 가속도가 붙으면서다. 내 소설의 단골메뉴는 가난이었고 그로 인한 상처와 결말은 해피엔딩이었다.
시아버지는 임종 직전까지도 말했다.

“우리 집안에 목사 하나는 나와야지, 내 이 꿈 하나 붙잡고 이제껏 버텨왔다. 노인네 쓸데없는 욕심이라 생각하지 말고 우리 석호 반드시 목사 만들어라.”
남편은 그 약속 이루어 드리겠다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상에 인간관계만큼 힘든 건 없어 보였다. 보통 시골 인심이라고 하면 순박하고 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은 토박이인 농민에다 전국에서 모여든 군인가족으로 이루어져 인심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장날 시장에 가면 팔도사투리가 어우러져 극 마당을 보는 것 같았다. 농심(農心)은 천심(天心)? 그것도 아니었다. 직원들의 면면을 보면 대도시의 살벌함과 결코 뒤지지 않았다.

분노가 가슴 속에 켜켜로 쌓여가던 어느날, 직원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드디어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내게 적대적으로 대하던 상사가 술에 취하더니 내게 음담패설과 함께 급기야 성희롱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너 처녀냐?”
직원들끼리 술잔이 오가더니 묘한 눈초리가 내게로  향했다.
“너 아다라시 맞냐구? 저런 것도 기집이라고 데려갈 사내놈이 있을까?”

그는 껄껄 웃더니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녀석은 이미 술독이 올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빛에 살모사 뱀이 수천마리가 보였다. 나보다 겨우 여섯 살밖에 안 많은 놈이 나하고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저러는가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내 안에 비굴함이 보였다.
그래 바로 그거였어. 저 인간에게 책잡힌 원인이. 비굴. 바로 너였어. 어릴 때부터 가난에 찌들고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온 내 이력이 상대에게 고스란히 노출 되었던 것이다. 은연중에. 설움이 가슴 밑바닥에서 폭포수처럼 일어났다.

“내 살다가 저런 호구는 처음 본다니까. 넌 입도 없냐? 자존심도 없냐구?”
그러자 옆에 앉은 동료가 그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그만하라고 만류했다.
“허참 그만하시죠. 농담도 지나치면 악담이 됩니다.”
그리고 내게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바닥에 붙었는지 꼼짝할 수 없었다.
“얼굴이 못났으면 몸매라도 화끈하게 좋던가, 어디서 허리는 도라무통에다 다리는 이건 완전 조선 무우 다리야.”
그러자 옆에 있던 또다른 남자 직원이 말했다.
“꼭 데리고 자 본 사람처럼 말하네.”

그 순간 나는 머리꼭지가 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입에서 생각지도 않는 욕설이 끝도 없이 타져 나왔다.
“야! 이 망할 자식아, 난 너보다 니 여편네가 더 한심하다. 어디 남자가 없어서 너 같은 놈을 서방이라고 데리고 사냐? 너 같은 놈은 당장 저 휴전선 넘어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야 돼. 넌 개쓰레기야, 아니 너 같은 놈은 쓰레기 하치장도 아까워.”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직원의 술잔을 빼앗아 그 막되 먹은 상사의 머리에 쏟아 부었다. 순간 그의 억센 손아귀가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고 한참 드잡이가 있었던 것 같다. 여러 손길이 그와 나 사이를 오가며 많은 말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다음 순간 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는 내 자취방에 누워 있었다.
난 그를 징계 위원회에 회부하려고 했다. 아니 상부 기관에 그를 고발 조치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왕 엎지러진 물이었고 이판사판이었다. 그러자 여적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직원들이 갑자기 천사 행세를 하면서 극구 말리는 것이었다.
“왜 그래, 미현씨답지 않게.”
“나다운 게 뭔데요?”

그때 내 안에서 음성이 들렸다. 너 소심증 환자잖아 너 비굴하잖아, 여적 쭉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니?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에 심장이 조각나는 것 같았다.
“그래 내 이까짓 직장 때려치우면 되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을 것 같아? 이런 촌구석에서 겨우 지방 공무원이나 하는 주제에 사람을 뭘로 보구. 겨우 지방대학 나온 주제에.”
마지막 문장에 나는 힘을 더했다. 망할 자식 겨우 지방 대학 나온 놈이 나한테 학점 운운해? 생각 같아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깨진 술병이나 흉기를 사용해 녀석의 숨통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그동안 쌓인 분풀이를 할 수만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이 떨려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가난에 찌든 내 모습과 집안 식구들이 떠올라 후회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얼마나 비굴하던지 차라리 땅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직원들은 내게 타지에 전출 신청을 하는 방법도 있으니 사표는 재고(再考)해 보라고 만류했지만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거둘 수는 없었다. 내게도 마지막 남은 체면이란 게 있었다. 사직서는 일주일 만에 수리되었다. 마지막 수순을 밟고 그곳을 떠나던 날,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죽어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말뚝박이가 되겠다던 그가 타지방으로 전출 신청을 했다는 것이다. 내게는 단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 난 그가 왜 내게 그렇게 혹독하고 야비하게 굴었는지 지금도 잘 모른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다. 내 안의 궁기(窮氣) 비굴함. 혹은 그와 비슷한 거.

그로부터 나는 영원히 객지와 이별했다. 다신 이 끔찍한 곳을 찾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십번 다짐했다. 그리고 악감정이 들 때마다 소설로 우려먹으면서 끊임없이 원수갚기를 시도했다. 내게 상처 준 상사를 소설로 끌어들여 난도질하고 파멸로 끝맺음을 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난 옛 직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 상사가 다른 곳으로 전출돼 가서도 내게 했던 똑같은 짓거리를 여직원에게 했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 됐는데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보상을 치르고 간신히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여직원들은 그가 안 보일 때마다 인간말종이라고 수근댔다. 35년 전 그 기억은 항상 내 뇌리에 뇌관처럼 숨어 있었다. 이젠 그만 분노를 풀어버릴 때도 됐건만 기억의 끈은 놓아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지인과 함께 읍내 거리를 몇 번 배회하다 서울행 시외버스를 타고 귀경했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는 수없이 많은 터널을 연이어 보여 주었다. 차창 밖으로 35년이란 세월이 한순간에 비켜 지나가고 있었다. 부끄러움과 알 수 없는 후회감으로 가슴이 저려왔다. 다신 이곳을 찾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일 년쯤 시간이 지나자 또다시 그곳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해결 못한 미진함이 가슴 한켠에서 계속 요동하고 있었다. 가을빛이 짙어가던 어느날 난 드디어 두 번째 방문 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나 혼자였다. 집을 나서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소설구상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두려움이 먼저 마음을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외버스에 올랐는데 앞자리에 앉은 20대로 보이는 여자애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고양이는  귀엽지  

시외버스는 중간 경유지인 춘천을 거쳐 마지막 종착지가 ◯◯였다. 시외버스가 강변도로를 지나 산야를 여러번 지나더니 아파트촌이 나타났다. 춘천이었다. 객지에서 직장생활 할 때 공무원 연수교육을 위해 몇 번인가 방문했던 곳이다. 그때만 해도 춘천은 논밭으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지금은 거대한 아파트군락으로 변했다.

서울과 전철이 직통하면서 새로운 문화도시로 변신하고 있었다. 버스가 춘천 시외버스터미널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넓은 광장에서 비바람이 사납게 달려들었다. 어디선가 닭갈비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며 다가왔다.  
보이는 상호마다 춘천의 명물 막국수와 닭갈비라고 쓰여 있었다. 의암호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교각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격세지감이었다. 춘천도 근 30년 만이었다.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30년도 넘는 세월이 눈 한번 깜빡이고 났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예전에 소양호에서 출발하던 쾌속선이 생각났다. 신설된 도로와 함께 승객수가 감소하면서 폐쇄 되었다는 선착장도 생각났다. 선착장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와 진달래 만개한 벚꽃도 생각났다. 춘천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명동 거리도 생각났다.
한꺼번에 기억이 출몰하면서 나는 잠시 황홀경에 빠졌다. 누군가 말했었다. 세월은 고마운 거라고. 용서와 망각을 한꺼번에 선물해 주는 세월은 신비 그 자체라고, 어불성설 같지만 그 말이 믿어졌다. 나는 주변에 있는 특산품 가게에 들러 그 유명하다는 시레기 나물을 샀다.

그리고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로 향했다. 도로를 지날 때마다 춘양로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엄청나게 긴 터널을 수없이 지났고 어느새 국토의 정중앙이라는 안내 팻말이 보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바닥에 짚단이 쌓여 있었고 짙푸른 하늘에 흰 뭉게구름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이윽고 시외버스가 ◯◯에 닿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처럼 관공서 건물과 인근 학교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두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어색한 느낌은 덜한데 예감이 불길하고 좋지 않았다.
청명한 가을날씨인데 자꾸만 땀이 났다. 폐쇄된 상가는 작년보다 더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이젠 일반 사병도 저녁 6시 이후면 외출이 가능하다고 하니 장사가 더 잘 될 법도 한데 상권 자체가 아예 죽어 있었다. 삭막하고 황량한 바람은 여전히 읍내를 날아다녔다.

이상했다.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는 낭만이나 시골 정서는 없고 삭막한 건 여전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음식점을 찾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상가임대라고 써져 있었다. 하긴 어디 이곳뿐이랴. 서울에서 가장 상권이 발달했다는 서울 명동이나 강남도 마찬가지인 걸.
골목길 끝에 있는 피자집에 들어가 간신히 허기를 때웠다. 어찌나 짜고  시금털털하고 맛이 없는지 한번 간 사람은 다시 찾지 않을 것 같았다. 내친 김에 전통시장도 구경했다. 방앗간과 떡집 이불가게 옷가게 말고는 대부분 페업 상태였다. 얼마나 심각한지 이러다 군(君) 자체가 소멸되는 건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다.

예전에 있던 그 많은 술집과 여관, 음식점 다방 옷 수선점은 다 어디로 가고 상권이 완전 죽어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마지막 남은 상권마저 붕괴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경찰서 옆으로 관공서 건물이 이어지고 군청과 교육청 면사무소 읍내에 단 한뿐인 종합병원도 보였다.

정신없이 걷던 나는 가방을 뒤져 선글라스를 꺼내 꼈다. 옆을 지나던 중년남자의 모습이 어딘지 낯익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비굴함이 낮은 자존감이 소리 없이 목울대를 채웠다.
나의 밑바닥 감정을 채우고 있던 그 비열한 상흔들. 모순되고 억눌렸던 과거의 감정의 찌꺼기들이 분노와 함께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내 머리 위로 까치떼가 날아갔다. 발길을 동네 어귀로 돌리는데 대추나무가 보였다. 탐스런 빨간 대추가 주렁 주렁 열려 있었다.

손을 뻗어 대추를 입에 넣는 순간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렸다. 전형적인 강원도 사투리였다.
“어디서 또 술을 드신 거래유? 자꾸 술 드시면 당뇨 수치가 높아져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 드렸슈. 지발 술 좀 작작 드시라구유.”
“냅둬, 이러다 죽고 말겄지.”
“그런 말이 어딨어유, 술 끊고 며느리 손주도 보면서 보란 듯이 사셔야쥬.”
가만 이야기를 듣자하니 노인은 이미 술 중독 상태인 것 같았다. 그 결과로 당뇨가 왔는데 이미 손 쓸 상태도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도 효자 아들은 며느리 공대 받으며 손주 재미까지 보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술 중독에 빠진 시아버지 모실 며느리가 어디 있다고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인 줄 아냐? 일찌감치 꿈 깨라 꿈 깨. 니가 효자인 걸 인정하겠다만 남의 귀한 딸 고생시킬 생각일랑 아예 거둬라.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는 막 골목길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저 좀 보세유, 혹시 혹시.”
아무래도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 휙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내 몸은 돌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김성순이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서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전의 그 효자 아들은 다름 아닌 김성순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노인장이었다.

내게 무한한 고통을 주던 그 악덕 상사가 초로의 노인이 되어 아니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후줄근한 어깨에 온갖 죄 짐을 다 지고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늙고 초라하게 변해 있었다., 그의 불안한 눈빛이 계속 나를 주시하면서 내 전신을 살피고 있었다.
어찌 알았을까. 선글라스를 꼈고 35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지났는데. 나는 쏟아지는 두려움에 몸을 휙 돌리는데 순간 선글라스가 바닥에 떨어졌다. 손으로 집어 올리는 순간 김성순이 말했다.

“어머님, 저 석호 친구 성순이에요, 왜 모른 체 하세요.”
“그냥 그냥.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지.”
나는 도둑질 하다 들킨 사람처럼 빠르게 뛰어 도망쳤다. 뒤에서 김성순이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알 수 없는 미진한 감정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며 가슴을 압박했다. 어떻게 뛰어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제일 먼저 도착하는 시외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하고 ◯◯를 빠져 나갈 때까지 심장 박동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버스가 어둠에 사윈 들판을 지나 계속 전진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친 거니? 무슨 큰 죄라도 지었니?”
안에서 음성이 들렸다. 죄는 내가 왜? 난 아니거든.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워 도망친 건데? 내 안에 비굴함이 너무 부끄러웠어. 난 그 비굴함 때문에 얼마나 많이 넘어지고 실패했는지 몰라. 매번 자포자기 하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기고. 그건 다 옛날 이야기잖아.

그렇지 다 옛날 이야기지.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재연되는 걸 느꼈어. 난 지금도 그게 너무도 두려워.
그때였다. 내안에 또 다른 음성이 들렸다. 이젠 과거와 이별할 때가 되지 않았나. 언젠가 남편이 들려준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 들은 설교 제목도 생각났다.
‘하나님은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느니라.’
시외버스는 사행길을 지나 서울로 진입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여는데 뉴스 화면이 떴다.

부산시장 오거돈이 성추행 건으로 끝내 하차하고 말았다는.
그리고 내 안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래도 난 성추행 당한 건 아니었으니까. 위로도 안심도 아닌 이상한 감정이 김성순 부자의 얼굴과 함께 묘하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세상이 좋아져 갑질의 행태가 도마에 오르고 힘없는 여자들에 대한 성추행이 고발당하는 시대가 되었다.

35년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세상은 악을 향해 치닫지만 그래서 온통 암흑처
럼 보이지만 가는 불빛은 반드시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용서와 복수는 항상 공존하듯이.
시외버스가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아들 석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자기가 이번에 신학스쿨에서 첫 번째로 설교했는데 제목이 비굴한 자를 일으키는 하나님이라는 거였다.
참 희한한 우연도 다 있지. 나는 적이 안심이 되며 웃음이 나왔다.
순간, 진정한 자유가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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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 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두번째 방문     신외숙 2020·04·25 249
1679 (단편) 로즈호텔 613호 (끝)     mount 2020·01·27 181
1678 (단편)로스호텔 613호 2     mount 2020·01·27 176
1677 (단편)로즈호텔 613호 1     mount 2020·01·27 146
1676 (단편) 춘천에서     신외숙 2019·09·11 306
1675 (단편소설)손뼉 소리3(끝)     mount 2019·08·25 198
1674 (단편소설)손뼉 소리2     mount 2019·08·25 177
1673 (단편소설)손뼉 소리1     mount 2019·08·25 143
1672 [중편] 개고기를 먹는 나라 3 - 완결편.     이일우 2019·08·10 179
1671 [중편] 개고기를 먹는 나라 2     이일우 2019·08·10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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