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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5-- 종결
four진08-09 20:13 | HIT : 140
25.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예상치 못한 폭염이 연일 계속되었다. 뉴스에서는 기상 관측 이래 최고라며 40도를 웃도는 기온에 늘어나는 온열 질환자들에 대한 우려 섞인 소식을 연일 뉴스 화두로 올렸다. 에어컨 사용 급증으로 전기세 누진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여론도 들끓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에 대한 조속한 대책을 지시할 정도였다.  
  현수의 집도 폭염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에어컨을 틀어야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 년 통틀어 10회 내외, 그것도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 아이들 다 모였을 때만 몇 시간 틀고 말았는데 이번 더위에는 전기세 폭탄을 예감하면서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이게 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인간들이 만든 공해가 주범이라고 아이들까지 성토할 지경이었다.

“난 여름이 정말 싫어. 너무 끈적끈적하고 더워.”

  방학이라고 몇 날 며칠 집 밖으로는 나가지도 않은 채 휴대폰만 끼고 뒹구는 은기의 말에 은제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에어컨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돼. 쪽방에서 선풍기 하나 틀어놓고 사는 사람들도 많아. 이게 다 인간들이 저 편하자고 만든 기계들에서 내뿜는 이산화탄소 때문인 거야. 자업자득이지.”

  방울토마토를 씻어 아이들 간식을 준비하던 현수가 ‘자업자득’이라는 말에 찔끔했다. 자신이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지칭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다 스스로 과민하다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얼마 전 가정 폭력범으로 몰렸던 일이 생각날 때마다 은제가 약간은 밉기도 했다. 잊어야지 하다가도 문득 어느 구석인지 모를 구석탱이에 찌그러져 있던 상처를 발견하고 나면 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변호사와 황 형사의 말이 자꾸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사고 유발자’ ‘거의 매일 술만 마시면 욕하고 때린’ 가정 폭력범.
  게다가 며칠 전 조사가 다 끝난 줄 알았던 아동 보호 전문 기관으로부터 어이 없는 전화를 받은 후라 더 했다. 형사의 조사와는 별개로 그녀의 음주, 욕설이 아동 폭력이라고 인정된다고 판단, 은제가 만 18살이 되는 시점까지 계속해서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은제의 생일이 12월이니 그때까지는 눈여겨 보겠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기가 막혀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믿지 못하겠는데 아이는 어떻게 놔두나? 그것도 몇 달에 한 번 삐쭉 전화해서 확인하는 것, 그게 확인이냐? 협박 해? 왜? 그렇게 못 믿겠으면 데려가지.’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 했다.
  그녀는 방울토마토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병원에서 처방 받은 약을 삼켰다. 처음엔 알약조차 명치에서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신물, 신트림 현상이 계속됐다.
  동네 가정의학과 의원에서는 문진만으로 그의 병명을 위염 내지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진단했다. 그 원인이 될 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약을 먹은 덕인지, 시간이 지난 덕인지 밥을 넘기는 것조차 버겁고 숨이 막힐 것 같았던 고통은 그냥저냥 견딜 만 해졌다. 가끔, 아주 가끔 명치를 찌르는 듯 조여드는 아픔이 10여분 동안 이어질 때에는 숨죽이고 누워 있다 보면 또 그렇게 나았다. 아무래도 당분간 은제가 만 18살이 되는 날까지는 완치가 쉽지 않을 성 싶었다.
  몸도 마음도 조금은 견딜 만 하니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짝 들었다. 취업 사이트를 뒤지는 동안, 경력도 기술도 없는 사람이 제 입맛에 맞는 직장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재삼 깨달았다.
  며칠 전 나이 제한이 없는 곳으로 잘 골라 두 군데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온라인 이력서를 넣어보았지만 전화 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당최 48살 먹은 전업 주부에게 열려 있는 문이란 게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전혀 모르는 이로부터 ‘배우면서 일하는’, ‘재택근무로 월 500’ 이란 유혹적인 문구로 메일을 받기도 하지만 믿지 않았다. 세상에 설렁설렁 돈 벌 수 있는 행운이란, 자신에게 절대 없을 거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살다보니 그랬다. 거저 얻어지는 것은 결코 없었다. 노력한 만큼, 절실한 만큼, 사랑한 만큼만이 제 몫으로 돌아왔기에 자신이 얼마나 노력도 없이, 절실함도 없이, 사랑 받기만을 바라며 살아왔나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하아, 사는 게 참 힘드네........’

  술 생각이 간절했다. 오늘까지 술을 마시지 않고 버틴 날을 세어보니 2주하고도 하루나 지났다. 은제와의 약속대로 혼술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우진이 지방 출장이 있어 한동안 만날 수 없게 되니 도리 없이 금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참자, 참아.
  도를 닦듯이 마음 비우고 이번에는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고 있는데 마침 정숙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걸려온 악몽 같은 전화들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는데 술 한 잔 하자고 하니 더욱 반가웠다.

“청첩장도 줄 겸 해서.......”

“우편으로 보내도 되는데.......”

“겸사겸사 얼굴 한 번 더 보자는 거지 뭐. 결혼하면 이렇게 돌아다니기도 힘들 것 아냐. 할 말도 있고.......”

  못 이기는 척 약속을 잡은 뒤, 방을 나오는데 은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뭐 좋은 일 있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비실비실 물린 웃음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정숙이 이모 알지? 어려서 너 맛있는 것 많이 사줬었는데......”

“알지.”

“정숙이 이번에 결혼한대. 청첩장 주러 온다고 해서 오늘 만나기로 했어.”

그녀가 아이들 저녁거리로 감자국과 돈까스 등을 부리나케 만들어놓고 집을 나서는데 은제가 인사랍시고 던진 소리라니,

“엄마 술 조금만 마셔.”

그녀는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알았어, 쯧.”

그러나 뒤이은 은제의 말에 그녀는 순간 제 비뚤어진 심사를 후회했다.

“엄마 아프잖아.”

  은기도 소리쳤다.

“엄마, 잘 다녀와!”

  왠지 울컥했다.
  저 녀석들이 엄마 걱정을 다 해주네, 엄마 아픈 것을 알기는 아는 구나, 하니 명치가 아니고 온 심장이 뻐근해졌다.
  이틀 전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에게 온 재근의 문자 내용을 은제에게 전달했다.

<은제 은기 잘 지내지? 매일 보고 싶다고 전해줘. 아빠 보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도 된다고....... 사랑한다고도.......>

  애써 밝은 척 하고 있는 재근을 떠올리니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는데, 별안간 은제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이 아닌가.

“왜?”

“아빠한테 미안해서...... 내가 너무 못되게 군 것 같아서.........”

  아빠에 대한 은제의 진심 어린 눈물을 겨우 만나게 된 현수는 기뻤다. 이 기회에 부녀지간에 특별할 수 밖에 없는 관계 개선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도 생겼다.

“그래. 아빠 그런 사람 아닌 것 너도 알잖아.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것 너도 알지? 아빠 너 전혀 안 미워해. 엄마한테 너 마음 돌릴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어. 괜찮으면 이번 주에 아빠 만나러 가 볼까?”

  그런데 은제는 아직 마음을 열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냐.”

“왜?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아빠 너 많이 기다릴 텐데....... 아빠 이제는 절대 엉덩이 안 만진다고 했어. 너희들에게 절대 화도 안 낸다고 엄마랑 약속했어. 몰랐던 거야. 할아버지가 워낙 엄하고 무서운 분이라, 그렇게 자식을 키우는 것이 옳다고 여겨서 그랬던 것 뿐이야.”

“어쨌든 싫어. 무서워........”

  은제는 아직도 아빠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 인생 18년 동안 자신을 예뻐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보고 자랐으니 그 마음 바꿔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녀는 더 이상 은제를 보채지 않기로 했다. 재근이 기다린다고 했으니 은제가 스스로 아빠를 찾을 때까지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신경을 쓰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제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정도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했다.

“그래. 아빤 기다려줄 거야. 은제, 은기 많이 사랑하니까.......”

  어느새 정숙과 만나기로 한 일본식 선술집에 도착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보는 순간, ‘아, 일본!’ 할 정도로 왜색 짙은 인테리어며, 장식품들로 아기자기한 작은 술집이었다. 네 개의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이블과 통로가 좁은 주방을 감싼 빠엔 손님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중 가장 안 쪽 테이블에 정숙이 홀로 앉아 이미 사케 한 병을 시켜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앉자마자 검은 셔츠와 앞치마 차림의 젊은 남자 종업원이 먹음직스러운 오꼬노미야끼와 빈 잔 하나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갔다.
  
“일찍 왔네.”

“강호씨가 이 쪽에 일 있다고 해서 데려다주고 갔어.”

  정숙은 가죽으로 된 빨강색 핸드백에서 청첩장 하나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천안이네.”

“강호씨 텃밭이잖아. 초중고, 심지어 대학까지 거기서 나왔으니 알만 한 사람은 다 알지.”

  정숙은 그녀의 잔에 사케를 따라주며 짧은 한숨을 슬며시 내뱉었다. 얼마 전 강호와 함께 만났을 때의 흥분되고 행복한 표정은 아니었다.

“걱정 되니?”

  그녀의 물음에 정숙은 제 속내를 들킨 듯 히죽 웃었다.

“조금.”

  언뜻 자신의 결혼 당시 일이 떠올랐다. 그녀도 그랬다.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와 결혼 직전과 결혼 직후와 결혼해서 함께 살면서는 때마다 느끼는 불안함과 불편함의 난이도가 각각 달랐다. 특히 결혼 직전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긴 밤 잠 못 들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괜찮아. 결혼 전엔 다 그래.”

  술 한 잔 들어갈 때마다 온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가 에어컨 바람에 식기를 반복했다.
  알레르기가 있는지 정숙의 목 부위가 드문드문 빨갛게 일어났다. 그래도 금방 안주로 나온 연어회 샐러드가 만족스러운 지 한 점 입에 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으음. 여기 연어회 정말 맛있네. 여름엔 보통 비린데 하나도 안 비리고 고소해. 강호씨 데리고 한 번 더 와 봐야겠다.”

“강호씨도 회 좋아해?”

“그럼. 우리 만나면 1차는 횟집, 2차는 조개 구이집이 보통이야. 요즘 더워서 그렇지, 그 사람이나 나나 해산물 킬러라 천안 일대 안 가본 횟집이 없을 정도야.”

“입맛이 맞는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녀는 우진을 떠올렸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입맛도 그렇게 안 맞을 수가 없었다. 회나 고기를 좋아하는 그녀, 야채와 된장을 좋아하는 그. 아침에도 고기를 먹는 그녀, 절대 아침에는 고기를 안 먹는 그. 짜고 매운 것을 싫어하는 그녀, 짜고 얼큰한 것을 좋아하는 그. 그러면서도 안 싸우고 만나는 것이 희한할 정도였다. 오히려 성격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했던 재근과 살면서 안 싸운 날보다 싸운 날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결혼은 연애와 다르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참 연어회 샐러드 맛에 찬탄을 아끼지 않던 정숙이 불쑥 물었다.

“언니, 지금 뭐 해?”

“백수인데.......”

“그럼 화성 내려올 생각 없어?”

  정숙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자신이 이번에 새로 입사한 신문사에서 기자를 뽑는데, 그녀를 추천하겠다는 것이다.

“내 나이도 뽑아주니?”

“상관없어. 기자하겠다는 사람은 많은데 들어오면 줄줄이 퇴사야. 대부분 어깨 힘 빡 주고 기자연하고 다니는 게 멋있어 보여서 들어오긴 하는데 중앙지처럼 인정도 못 받고 월급도 박하니까 견디지 못하고 나자빠지더라고. 그러다보니 우리 신문사에서도 자연, 채용 기준이 낮아졌어. 학력이나, 경력, 나이 따지지 않고 허세 많은 사람 말고, 글 재주 좀 있고, 열정만 있으면 돼. 사교성까지 갖추고 있다면 금상첨화지.”

“기자든 뭐든 밥벌이가 돼야 하지.”

“물론 월급은 생각보다 적지만 부수입이 좀 있어.”

“부수입?”

“지역 신문이다보니 ‘인물 탐방’ 코너 같은 류의 개인 홍보 지면들이 많은 편이야. 지역 유지, 지역 출신 사업가들을 찾아다니면서 인터뷰를 따오는 거 말이야. 연예인들은 인터뷰도 돈 주고 해야 하잖아. 이 양반들은 달라. 잘 좀 써 달라고 몇 푼씩 찔러주거든. 이게 거의 주 수입이라고 보면 돼.”

“아........”

  그녀도 대학을 갓 졸업했을 당시, 격주간지 기자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다. 물론 금방 폐간돼서 그만 둘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그 쪽 사정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인물과 여행 정보를 담은 잡지였는데 그녀가 첫 인터뷰를 맡은 사람은 지역 협회 지부장이자, 국전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바 있는 관록 있는 서예가였다. 그런데 첫 인터뷰였던 탓에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인터뷰 내용을 담은 녹음기 재생 결과 녹음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낭패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인터뷰를 다시 하자 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다른 인터뷰어가 쓴 인터뷰 내용과 자신이 들어 기억하는 내용을 짜깁기하는 잔재주를 부릴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서예가가 기사 내용을 흡족해하더라는 것이다. 급기야 그녀를 식사 자리에 청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는 길에 슬그머니 돈 봉투를 찔러주었다. 마다하는 척은 했지만, 월세 내기도 빠듯하던 시절이라 못 이기는 척 받아 가방 속 깊숙이 넣어왔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봉투 속에는 20만원이 들어있었다.
  그게 뭐라고 떠올리니 괜히 웃음이 났다. 20만원을 받아 그토록 먹고 싶었던 삼겹살을 한 근 사다가 혼자 먹고, 남은 돈으로 월세를 냈던 당시는 나름 행복했었다.

“오랜만에 웃네. 언니 지난번에 잘 웃지도 않고 힘들어 보여서 무슨 일 있나 걱정했었는데......”

  그녀는 정숙이 눈치가 빠른 것이 아니고, 제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겠거니, 하고는 간단히 대꾸했다. 이제 잊어야 할 일, 잊고 싶은 일,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은 일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면서 다시 떠올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은제 때문에 일이 좀 많았어.”

“은제가 속 썩여?”

“그런 건 아니고....... 고 3이잖아.”

  그 말에 정숙은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고 3. 대한민국 부모들의 큰 상전이지. 우리 사촌 언니 딸내미도 장난 아니었어. 공부한다고, 독서실 간다고 나가서 늦게 들어오고 하니까 기특한 마음에 용돈 주고, 약 해 먹이고 열심이었지. 그런데 성적은 안 오르지, 이상하게 용돈은 매일 부족하다고 하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남자 친구 만나고 다녔더라는 거야. 한 바탕 난리 났잖아. 언니가 미친 년, 정신 나간 년 하면서 엄청 팼던 모양이야. 조카가 머리끄덩이 뜯겨서 우리 집으로 도망 왔더라니까. 뭐, 물론 바로 잡혀서 끌려갔지만.......”

“그래?”

  그녀는 그저 별 느낌 없이 추임새를 넣었다. 다들 그러려니,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려니, 요즘 애들 다 그런가보다, 은제도 다를 바가 없었던 거다, 했다. 취기가 도니 더욱 남 얘기가 내 얘기 같고, 내 얘기는 남 얘기 같은 묘한 기분이 되어 멀찍이에서 제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관망하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새 그녀의 시선은 정숙이 아닌, 주변을 슬슬 돌기 시작했다. 혼자 떠드는 정숙의 얘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한 탓이다.
  뒤쪽 테이블에 앉은 저 교태부리는 여자의 뾰족하게 깍은 코며 턱이며 아무래도 성형에 실패한 모양이네, 주방장들은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고 저렇게 8 부나 긴 소매 옷을 팔꿈치 위까지 걷어 입는 걸까, 어라? 저 녀석은 맞은 편 편의점에서 알바 하는 녀석, 담배를 몇 대나 피우고 들어온 거야? 냄새가....... 하면서 전혀 상관도 없는 사정들에 멍한 시선을 한 번씩 주고 돌아왔다. 그 때까지도 정숙의 그 사촌 언니와 딸 얘기는 끝이 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웃기는 게 그 언니 직업이야. 고등학교 상담 교사로 일하는데, 말하자면 학교에서 자기 딸 또래 학생들 말 귀담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는 역할 하는 사람 말이야. 그러면서 정작 자기 딸 얘기는 쥐어줘도 듣지를 않았던 모양이야. 왜 그랬는지, 어떻게 된 건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더래. 무조건 패고,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감시하고, 방과 후엔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끌고 가곤 했다는 거야. 오로지 목표는 대학. 반드시 ‘인 서울’해야 된다고. 그 언니 성격이 그렇다보니 조카가 많이 힘들어 했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또 웃기는 건, 얼마 전에 그 언니랑 가족 모임에서 만났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자기 학교에 한 아이가 상담을 왔는데 그 엄마가 술 마시는 횟수가 잦고, 또 욕도 했다면서 아이가 울더래. 그런데 매일 술 마시는 것도 아니고, 술 마시고 애들 건사 안 한 것도 아니고, 애들이라면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냥 그럴 수도 있겠거니 위로만 하고 넘어갔대. 문제는, 얼마 전에 사고 한 번 터졌잖아. 대구 어느 학교에서 한 아이가 학교에서 당한 폭력을 상담 교사에게 상담까지 했는데 방치했다가 자살한 사건 말이야. 그게 문제가 돼서 그 상담 교사, 문책 당하고 해고당했다거든. 그래서 언니가 걱정하더라고. 자기는 법적으로 지정된 신고의무자이고 상담까지 받았는데 신고 안 하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냐고? 300만원 과태료 어쩌고 하면서 말이야.”

  갑자기 그녀의 귀가 번쩍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다 싶은데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눈을 부라리고 정숙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관심이 돌아온 듯 진지하니 정숙은 더욱 신이 나서 얘기를 떠벌였다.

“뭘 그래서야? 내가 신고하라고 했지. 한달보름이나 지난 일인데 어쩌냐고 묻길래, 그게 뭐가 대수냐, 언니는 신고 의무자라 신고한 것 뿐이니 신고하고 뒤로 빠져라, 했지. 그 이후엔 경찰들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정숙은 베시시 웃기까지 했다.

“일단 신고는 했으니까 애가 잘못돼도 책임은 면할 수 있잖아.”

“그랬구나........”

  신나게 떠들던 정숙은 그녀의 안색이 굳어 있는 것을 보더니 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무슨 일 있어?”

  현수는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사촌 언니라는 사람, 너랑 같은 김씨니?”

“아냐. 그냥 사촌이 아니고 이종 사촌이라...... 김씨 아니고 안씨. 그런데 성은 왜?”

“이름이 뭐야?”

“안우경. 왜 아는 사람이야? 그러고보니 은제 K여고 다닌다고 했나? 그 언니도......”

  안우경.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알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녀의 눈앞에 자신과 재근을 신고하고 모함하고 은제와 부모 간을 이간질하고 시설로 들어가라고 종용하던 그 미친 년 뒤에서 신고하라고 조언했다는 장본인이 자신의 행동을 마치 무용담인 양 신나게 떠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아! 그녀는 순간적으로 ‘살의’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이를 바드득 갈자 정숙은 여전히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어, 언니........?”

“잘 생각해 봐. 그게 부모와 자식을 떼어놓을 만한 일인지. 너와 그 미친 년 때문에 한 가정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고 파탄에 이를 뻔 했던 사실에 대해 어떤 식으로 책임질 건지. 책임을 면피해보겠다고 신고하면 그 지목된 자들은 어떻게 될 거라는 것 생각이나 해 봤어?”

“그걸 왜......?”

  참다못한 그녀는 정숙의 얼굴에 남아있는 오꼬노미야끼를 엎어버렸다.

“그래, 이 미친 년아. 내가 그 상담사 년이 신고해서 상습 가정폭력범 취급당한 그 에미다!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은제 뒤에서 시설로 들어가라, 네 엄마가 협박하고 있는 거 아니냐, 속닥거렸던 거였구나! 설마 설마했는데......! 일단 신고는 했는데 무혐의로 나오면 자신이 난처해질 수 있으니까 명확한 혐의 하나라도 제대로 만들어 보려고! 너 결혼할 때 그 년 올 거지? 내가 목을 비틀어 버린다고 전해!”

  그녀는 더 이상 정숙과 마주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정숙의 얼굴에 뭉개졌다가 떨어지는 오꼬노미야끼 소스가 더러운 똥물이었으면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잠시 그렇게 시근대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이것도 신고 해. 너희들이 한 짓 세상에 다 알려서 낯짝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줄 테니까.”

  그녀는 주변 시선 따위 상관없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가게 밖은 열대야로 후덥지근했다. 뱃속에 고인 술들이 혈관을 타고 온 몸 구석구석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흠씬 두들겨 패줬으면 좋았을라나, 잠시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년들........아주 나쁜 년들........길가다가 미끄러져서 도랑에 머리 쳐박고 뒈질 년들.”

  그녀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밝혀진 골목길을 비틀비틀 걸으며 계속해서 욕을 씹어 뱉었다. 상담 교사의 속내까지 알고 나니 더욱 분하고 치가 떨렸다. 책임을 피하기 위해 뒤늦게 신고했다는 사실과, 신고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이를 뒤에서 부추겼을 거라는 추측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정의로운 사고의 소유자라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갑자기 오꼬노미야끼 소스와 가다랑어 포를 잔뜩 묻힌 채 눈만 껌뻑이고 있던 정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징그럽고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조금은 통쾌하고 우스웠다. 상담교사의 가정사가 그녀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는 사실과 이미 잘 알고 있는 정숙의 가정사를 떠올리니 비웃음이 비실비실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정숙이 유부남 좋다고 쫓아다니다가 임신까지 했던 전력이 있고,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면서 먼 길 환승할 때처럼 여러 남자를 갈아타면서 가정내 분란이 끊이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황 형사나 한 선생, 변호사, 기관에서 온 조사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제 할 일을 한 것 뿐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지 못한 점이 분하고 억울한 것이다.

“니들 집안은 어떤데? 댁네 집안은 안녕하신가, 말이야. 지들 집도 제대로 건사 못하는 것들이 어디 남을 조사하고 판단을 내려? 니들 집구석이나 잘 건사해!”

  어느새 그녀는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지나던 사람들이 미친 년 보듯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낮 내 뜨거웠던 지면을 식혀주기 위해 등장한 둥근 달도 따라다니며 웃었다. 그 달이 정숙의 얼굴에 붙은 오꼬노미야끼처럼 고소해보였다.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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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5-- 종결     four진 2018·08·09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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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3     four진 2018·08·04 121
1651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2     four진 2018·08·04 88
1650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1     four진 2018·07·31 81
1649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0     four진 2018·07·30 80
1648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19     four진 2018·07·27 78
1647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18     four진 2018·07·24 80
1646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17     four진 2018·07·20 76
1645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16     four진 2018·07·19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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