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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올리기 > 소설

<중편> 댁네 가정은 안녕하신가 23
four진08-04 17:01 | HIT : 121
23.  보호자

  주말이면 우진이 집으로 놀러오곤 했다. 그가 오면 은기가 제일 신났다. 둘은 시간 날 때마다 안방 침대 위에 나란히 엎어져 휴대폰 게임을 했다.
  일요일 아침에도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둘은 침대 위로 직행했다. 게임이 한 판 끝날 때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이겼다! 역시 아저씨는 나한테 안 돼요.”

“무슨 소리야? 내가 좀 전에 이겼잖아. 2:1.”

“아저씨 이번엔 우리 한 팀으로 싸워요.”

“스카웃 하는 거야? 내 실력을 이제 인정한다 이거지.”

  그동안 현수는 은제와 거실 벽에 기대 앉아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동물농장’이라고 일요일 아침이면 은제가 빠짐없이 보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눈이 찔린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유기묘를 보며 은제는 불쌍해, 를 연발했다. 죽은 친구 곁을 떠나지 못하는 절름발이 개를 보고는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문득 저렇게 동정심이 많은 아이가 왜 제 부모에 대해서는 그토록 인정사정이 없는 것일까, 언짢았다. 그렇게 부모가 잘못한 것일까, 잘못만 한 것일까, 안타까웠다.  
  이 때 은제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인 듯 은제는 갸우뚱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곧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휴대폰을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슬그머니 은제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은제는 무슨 일인지,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무슨 전화야?”

  현수가 물었다.

“황 형사야.”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일요일 오전에 형사의 전화가 왔다하니 혹시 재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황 형사가 왜?”

“아빠 고소장 써야 한다고.......”

“고소장이라니.......”

“내가 직접 써야 한대.”

  순간 그녀는 발끈해서 말했다.

“무슨 소리야? 고소장 쓰면 어떡해? 네 아빠 정말 성폭행범 만들 거야?”

“난 쓰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써야 된다는데 어떡해?”

“그런 게 어딨어? 당장 전화해서 안 쓴다고 해. 그리고 누구 맘대로 미성년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고소장을 쓰래?  말이 돼? 보호자인 내가 있는데?”

“엄마 말고 친척이나 다른 누구 없냐고...... 그래서 없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가 데리러 오겠대.”

“뭐?”

  말문이 막혔다. 형사는 가정폭력범으로 조사 중인 그녀를 배제한 채 아이만 데리고 재근의 고소장을 쓰게 하려는 게 분명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가정폭력으로 조사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죄인이 아니었고 분명히 아이의 보호자였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우진을 불렀다. 그 또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어이 없어했다. 그는 당장 전화해서 아이가 원치 않는 고소장은 쓸 수 없으니 아이 데리고 갈 생각 말라 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겁이 났다. 지난 번 황 형사와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다짜고짜 ‘거의 매일 술 마시고 욕하고 때렸다며? 너도 조사할 거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막는다고 하면 죄인 취급하면서 더 강하게 강제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은제 실종 신고를 할 때 경찰들을 대면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다고 은제가 제 발로 따라가 제 아빠의 고소장을 쓰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얼른 주변에 아는 사람이 누구 있는지,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어 줄 만한 사람이 있는지 머릿속을 샅샅이 뒤졌다. 역시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흔하게 등장하는 검사나, 변호사, 하물며 경찰 친구 하나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깊이 있게 알고 지내볼걸, 하고 20대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났지만 별 끌림조차 없어 차만 마시고 헤어졌던 일간지 기자까지 떠올렸다.
  가슴이 벌렁거리더니 그예 또 명치가 아팠다. 하지만 아픈 것을 느끼고 있을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변호사....... 지난 번 해바라기 센터에서 만났던 국선 변호사가 떠올랐다. 하등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법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변호사에게서 받아두었던 명함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휴대폰 전화 번호 밑에 이런 글이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통화 가능 시간 월~금 오전 9시~오후 6시. 이 외에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업무상으로만 사용하는 휴대폰인 모양이었다. 맥이 빠졌다.
  업무 시간 외에는 전화조차 받지 않는 국선 변호사. 영화에서 무고한 피의자를 돕기 위해 밤낮으로 진심을 다해 불의와 싸우는 변호사와는 근본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주말 동안 은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이토록 태만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해바라기 센터 소속 변호사라면 여러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대로 의무 방어만 하는 사람이려니 하고 접었다.
  우진은 계속해서 황 형사에게 전화해 보라고 채근했다.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자 도저히 안 되겠는지 은제에게 황 형사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막 은제가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려고 하는 찰나에 전화벨이 또 울렸다.

“엄마, 황 형사 전환데 어쩌지?”

  은제가 당황해하자, 우진이 그 전화를 받으려고 했다. 순간이었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싶은 마음조차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우진의 손에 쥐어진 은제의 휴대폰을 낚아채며 말했다.  

“당신은 빠져. 내 일이야.”

  보호자도 아닌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것도 그녀와 잠자리를 하는 소리를 은제에게 들켜 또 하나의 문제거리가 되었던 그가 끼어드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은 전적으로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가슴은 여전히 쿵쿵 울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할 테면 해봐라.

“은제 엄마입니다.”

  그녀의 말에 상대방은 잠시 조용했다.

“아이를 데리러 오신 건가요?”

“예.”

“제가 서은제 보호자입니다.”

“그야.......그렇죠.”

“어떻게 할까요? 제가 밑으로 내려갈까요? 위로 올라오실래요?”

  그녀가 단호하게 밀어 붙이자 황 형사는 뜻밖이라는 듯 냉큼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초가 조용히 흘러서야 순순히 대답했다.

“제가 올라가지요.”

  그녀는 우진과 은기를 안방에 가 있도록 하고 방문을 닫았다. 은제 또한 방에 가 있다가 부르면 나오라고 하고 이번에는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일, 이 자리에서 수갑을 차고 끌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그녀는 은제를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현관문 안으로 들어오는 두 명의 사복 경찰들을 보고 그녀는 깍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들어오세요.”

  앞장서서 들어오는 황 형사는 50대의 마르고 작고 까칠한 인상의 사내였다. 댕돌같은 단단함과 날카로운 눈빛에서 수십 년 경찰계에서 많은 범죄자들을 다뤘을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뒤 따라 들어오는 사내는 그보다 젊은 30대 후반 정도의 다부진 몸매에 키가 컸다.
  그녀는 두 형사를 식탁 앞으로 안내했다. 은제의 실종 신고를 하기 위해 제복 경찰 둘을 맞았던, 가정폭력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조사원을 맞았던 바로 그 식탁에서 이번에는 자신을 단죄하게 될 형사를 맞게 되었다.
  그녀는 황 형사와 눈을 마주했지만 매섭게 눈을 부라리지는 않았다. 대신 최대한 공손하게, 하지만 절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행동했다.

“은제를 만나시기 전에 제게 설명을 해주십시오. 보호자로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보호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황 형사가 전화 때처럼 화를 내고 야단을 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 두려움보다 큰 것은 자신으로 인해 가족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근도 현재로서는 가족의 범주 안에 드는 셈이었다. 보호자라는 사실만 기억하기로 했다.
  다행히 황 형사는 조곤조곤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일이야 아이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불원서를 쓰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라고 보입니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 사건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친고죄가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 해서 없던 일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신고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조사가 진행되고 처벌의 수위를 결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는 그녀도 근래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조금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애 아빠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제가 이런 저런 일로 아빠에게 서운한 것이 많았고, 워낙 어려서부터 물고 빨고 하며 예뻐하긴 했지만 고지식한 사람이다보니 아이들에게 무서운 사람으로 각인되고 있었던 터라, 과민하게 반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은 아버님 일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는 말씀인가요?”

“예.”

“어쨌든 저희는 서은제 학생을 통해 고소장을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히 은제 학생이 원치 않고 보호자이신 어머님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고소장이 아닌, 진정서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봅니다.”

“고소장과 진정서는 뭐가 다른가요?”

“고소장은 말 그대로 고소를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접수장이지요. 반면 진정서도 비슷한 용도로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고소장을 쓰지 않아도 조사를 해야 한다면 진정서를 쓰고 말미에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문구를 넣으면 정상이 참작될 소지가 많습니다.”

  어떻게든 아이를 데려가 고소장을 쓰게 하려고 했던 황 형사가 한 발 물러나 진정서를 쓰라고 하고 있었다. 솔직히 황 형사의 말이 사실인지조차 의구심이 들긴 했다. 고소장이든 진정서든 아이의 손으로 직접 제 아버지에 대한 죄목을 인정하는 글을 쓰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조사를 해야 하는 마당에, 나중을 위해서라도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문구를 넣을 수 있는 진정서를 쓰는 것이 재근을 위해서 ‘정말 맞다’ 면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을 것도 같았다.

“알겠습니다.”

  설명을 다 들은 그녀는 황 형사의 뜻에 동의하고 은제를 불렀다. 그리고 짤막하게 형사에게 들은 말을 설명해주었다. 은제도 곧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그녀는 은제 곁에 동석할 수가 없었다. 은제가 진정서를 쓰는 동안 그녀는 은제의 방에 가서 기다렸다. 제발 은제가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면서도 밖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가는지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조용조용 말하고는 있었지만 황 형사가 문장을 불러주면 은제가 받아 적는 식으로 진행되는 듯 했다.
  긴 듯 짧은 시간이 흘렀다. 황 형사가 그녀를 불렀다. 은제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  

“제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황 형사의 태도는 전화 때와는 사뭇 달라져 있어서 낯설기만 했다. 첫 통화 당시 정말 그녀의 추측대로 술이라도 마시고 전화를 받았던 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그녀에게 항변이든, 변명이든 제 생각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 아빠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소위 말하는 성추행이 당하는 사람에 따라 호감의 뜻으로 보일 수도, 더러운 수작으로 보일 수도 있으니 기준이 애매하지 않느냐는 것을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술을 자주 마신 것은 인정하나 때리거나 하지 않았으며 상습적인 폭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간곡한 말투로 전달했다.
  황 형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 말씀대로 성추행이나 성폭행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관심이나 호감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싫은 사람에게는 몹시 견딜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여지는 등 매우 주관적이라는 사실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은제는 안 좋은 쪽으로 판단하는 것일 테고요. 폭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적으로 때리지 않더라도 물건을 내던진다거나, 탁자를 뒤집어엎으려는 행동 또한 상대방이 위협으로 느끼고 폭력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폭력인 것입니다.”

  그녀는 바로 수긍했다. 빠른 수긍이 형사로 하여금 반성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의미에서였다.

“알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은........”

황 형사가 마지막으로 묻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러자 황 형사는 뜻밖의 말을 했다.

“어머님과 관련된 일은 은제 학생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불원서를 쓴 것으로 더 이상의 조사는 진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아버님에 대한 사건 조사를 함에 있어서 어머님을 참고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는 점,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은제가 불원서를 썼고 그로 인해서 그녀에 대한 조사는 끝났다는 얘기는 더 이상 그녀가 가해자나 피의자가 아니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제껏 그렇게 가슴 조이고 두려움에 떨었던 사건의 결말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게 당연한데도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두 형사가 돌아가고 나서까지도 어리둥절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진이 안방에서 튀어나왔다.

“어떻게 됐어?”

그녀는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잘 됐네. 이제 다 끝난 거잖아.”

  우진이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야 그렇지만 아직 애 아빠 일이 남았어.”

“그거야 잘 되겠지. 네가 참고인으로 얘기 잘 하면 되는 거고 은제에게도 잘 설명하면......나쁜 마음 갖고 한 짓도 아니라며.”

  제삼자인 우진조차 재근의 행동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게 다소 안심이 되었다. 다른 사람 누구도 나쁜 의도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라면 형사도 그런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마음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그야 그런데.......”

“다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진은 그녀의 혐의를 벗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큰 소리로 은제와 은기를 불렀다.

“은제야, 은기야! 피자 먹으러 갈까?”

  은기가 먼저 튀어나왔다. 하지만 반응은 별로였다. 저 좋아하는 피자를 먹자는 데도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안 먹어도 돼요.”

“왜?”

“30분 후에 친구랑 오버워치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모처럼 외식도 좋지만 아이가 이미 친구와 게임을 하기 위해 온라인 상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는데 그 약속을 깨면서까지 끌고 나갈 명분은 없었다. 은제도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왜? 너도 싫어?”

우진의 물음에 은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귀찮아요.”

“그럼 어쩌지?”

  그녀가 중재안을 내놓았다.

“시켜먹으면 되지.”

“그래, 그럴까?”

  그제야 은기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좋아하는 피자도 먹고, 게임도 할 수 있으니 1석2조인 셈이었다. 다만 은제는 여전히 멀컹멀컹하고 별 맛도 없는 알로에를 약이라고 처음 입에 넣었을 때처럼 불편해 보였다.  

“시켜먹자니까?”

“배 안 고파.”

  은제는 그 말 한 마디만 남긴 채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수는 얼른 그 뒤를 쫓아 들어가려고 했다. 우진이 그녀의 팔을 잡고 만류했다.

“그냥 놔 둬. 가끔은 생각할 시간도 필요한 거야.”

  뭐가 문제일까, 불원서까지 썼다면서? 내키지는 않지만 그저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쓴 것일까. 그래서 저토록 기분이 나빠 있는 것일까? 은제의 기분이 영 신경 쓰이는 그녀였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근래 몇 달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제 속으로 나았다고 해서 그 속을 다 알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고, 자식이 클수록 강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당장 궁금하다고 해서, 내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입을 봉하고 있는 아이의 입을 억지로 열려고 하다가는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자식이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먹이고 씻기고 기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엄마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힘든 마음 좀 내려놓자, 싶은 마음이면서도 문득 그 끝에 한 사람이 매달렸다. 며칠 전 재근의 음성이 떠올랐다. 대면하지 않았지만 그의 휴대폰 음성만 들어도 그의 심경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고 당당하던 음성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기운 없고 축 늘어진 모습만 눈에 선했다.

“매일 술 마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 도저히 잠을 잘 수도 없어. 내가........ 내가 은제를 성폭행한 애비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정말 못 견디게 힘들다. 숨이 막힐 지경이야. 어머니도 오늘 내일 하시는데....... 걷지도 못하셔. 나도 가끔은 못 알아보셔. 그런데...... 나 이제 누굴 믿고 사니?”

  왠지 막막한 그의 모습이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신통치 않은 그늘막처럼 후덥지근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이혼하고 헤어지면 완전히 남이고, 원수라고 하던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두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 외에도 그녀의 청춘을 함께 해 온 소중했던 사람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재근 혼자 잘 되고 있다면 배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그녀에게는 두 아이가 있고, 우진도 있지만 재근은 저 홀로 힘든 상황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위로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측은지심이든, 일말의 양심이든 그녀의 진심은 그랬다.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 놓고 혼자 미로를 탈출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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