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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춘천에서
신외숙 ( HOMEPAGE )09-11 13:43 | HIT : 113
(단편) 춘천에서

신외숙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게 더 힘들다.
어느 목회자가 말했었다.
그는 진실로 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받는 걸 원한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생의 진짜 목적을 사랑받고 인정받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돈과 명예 권력 등 많은 스펙을 쌓기 위해 목숨 거는 것이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로 떠오르는 것도 다 그 이유에서다. 일확천금을 위해 어떤 위험도 불사하고 배반과 불의와 협잡한다. 영화나 드라마는 대부분 해피앤딩을 위해 권선징악을 내세우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요즘 영화의 대부분은 악과 악의 대결이며 선이나 정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악이 보편화 되고 사람들의 인식에서 정의라는 개념이 빠르게 상실돼 가기 때문이다. 이유는 딱 한가지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사람의 생각이 어릴 때부터 항상 악하고 모든 계획이 악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이 악하고 타락한 게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세상이 종말을 치달을수록 그 현상이 더 극심해질 뿐이다. 그런 악한 인간 본성 속에서도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랑받는다고 해서 악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 다음 순서로 다스리고자 하는 욕구가 뛰쳐나와 온갖 악을 자행하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악한 본성 속에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꿈틀대다니. 자신은 남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하다니.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랑 받아본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어느 정도 일리(一理)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말도 된다. 어느 정도 수긍 가는 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사랑받는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과연 알까? 평생 상처 속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색하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지인(知人)과 함께 춘천을 찾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호반의 도시춘천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파트 군단이 들어섰고 도시화의 물결이 너무 급속하게 이루어진 것 같다. 남춘천이나 춘천 역사(驛舍)도 서울 전철과 직통하면서 엄청 세련되고 산뜻하게 대형화 됐다. 일반 전동차는 용산에서 2시간 가량 걸리는데 반해 ITX 청춘열차는 1시간 10분 만에 도착한다. 가격은 무려 세배 차이가 났다.
일반 전동차는 3200원인데 ITX 청춘열차는 9600원이었다. 태생이 느려터진 나는 집안일 하느라 일반 전동차를 놓치고 용산역에서 ITX 청춘열차에 탑승했다. 열차는 지하와 1층 2층까지 3개 층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빈자리가 없이 꽉 찼다.
주말이라 그런지 젊은 남녀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청춘열차는 일반 열차와 달리 입석을 자유석이라 해서 요금을 1900원 할인해 주었다, 난 무조건 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좌석 주인이 나타나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하층에 앉아 가는데 느낌이 묘했다. 살다가 지하에 있는 열차를 타보다니, 열차는 용산을 지나 옥수역과 청량리역에 잠시 정차하고는 빠르게 전진했다. 역을 통과할 때마다 승무원의 멘트가 나왔다.
일반 전동차가 아니니 청춘열차 승차권이 없는 사람은 빨리 하차하라고 했다. 후불 신용카드로도 정산이 안 되고 부정승차로 간주되니 그때는 요금의 10배를 부과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승차권을 점검하고 있었다.
열차는 도심을 벗어나 마석과 청평 가평을 지나면서 산야와 물길을 보여주었다. 와! 소리가 나도록 산천이 눈앞을 스쳐 가더니 어느덧 남춘천역에 닿았다. 역사(驛舍) 밖으로 나오자 뙤약볕이 발걸음을 가로막고 나섰다. 사거리를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는 교대이고 오른쪽으로 예술회관과 중부시장 명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글대는 태양을 이고 우리는 재잘대며 걸었다.
“춘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깨끗하고 조용하네요, 저 산 좀 보세요, 등성이가 세 개가 굽이져 있네요,”
“바로 저기가 신숭겸 장군 묘지가 있는 곳이래요.”
“어쩌면 천 년 전에 저런 명소를 찾았을까요? 저기 바로 옆이 박사 마을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예전에 유명했었죠, 한 마을에서 박사가 수십 명 나왔으니, 그것도 수십 년 전에 말이죠.”
“저기 보이는 저쪽에 의암호가 있는 곳이래요, 여기 춘천은 호수로 둘러싸여 구경할 데가 많데요.”
“그렇죠, 사실 저 어렸을 때 춘천 효자동에서 살았더랬어요, 우리 고모는 아직도 여기서 살고 계세요, 그래서 이곳 지리를 조금 알아요.”
“아! 그래요. 그럼 이왕 왔으니까 예술회관에서 연극 본 뒤 명동 쪽으로 가서 식사하고 쇼핑 겸 산책 합시다.”
“그런데 거리가 정말 깨끗하고 조용하네요, 참 예전에 강원도지역에서 근무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벌써 35년 전 일이네요, 여기 소양댐에서 쾌속선 배 타고 ○◯지역에 내리면 도내 버스가 있는데 읍내서 30분가량 걸리는 곳이었어요. 최전방지역이라 경비도 삼엄하고 인심도 각박한 편이었어요, 지금이야 굴을 뚫어서 2시간 안팎 걸리지만 그때는 소양호를 돌고 돌아가느라 4시간 30분 걸렸어요, 지금 꼭 소설 쓰는 기분이에요,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서울과 너무 멀리 떨어져 불안하지 않았나요?”  “그때는 젊었고 여행하는 기분이라 별로 나쁘지 않았어요. 난 인생을 여행이라 생각해요.” “여행 참 좋은 말이네요, 여행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선물이래요.”
“나는 여행갈 때마다 생각해요, 여행은 그리움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여행이란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올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맘껏 즐기라고 신이 허락한 은총이라 생각해요.”
“멋진 말이네요, 여행은 그리움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난 생각해요, 여행지에서 혹시 내가 그동안 그리워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그동안 살아온 안부를 묻고 그리움에 대한 회포를 풀면서 옛 추억에 잠기면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단짝이 있었는데 나의 말실수로 헤어졌었어요, 난 그 수십 년의 세월을 두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살았는데 언젠가 만나면 꼭 사과하리라 생각해요. 그 애도 이젠 할머니가 되어 손자를 보았겠네요, 우리 나이가 벌써 육십이라니.”
나는 말하다 말고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내년이면 나도 환갑이구나. 이 나이까지 살게 될 줄 상상도 못했는데.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그리움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예전에는 항상 미래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이가 육십이 가까워 오면서 생각이 늘 과거로 치닫는다. 몸도 기력이 쇠하면서 죽음이란 단어가 더 자주 보인다.
하긴 내가 언제 죽음이란 단어를 놓친 때가 있었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예술회관에 도착했다, 오래 된 석조건물로 약간 퇴색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많은 관객들이 연극을 보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무대가 엄청 넓고 객석에 빈자리가 많았다.
혹시나 아는 얼굴을 만나게 될까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대부분이 중장년으로 여유있는 표정들이었다. 자리에 앉는 순간, 객석이 어두워지면서 징소리와 함께 막이 열렸다. 무대 맨 뒤쪽에 있는 창호지 문살에서 창(唱)이 들렸다. 때는 1920년대 일제 시대였다. 구슬픈 창가(唱歌)는 당시 상황을 말해주듯 처량했다.
그때 양장(洋裝)을 한 여배우가 나타났다. 그녀는 날렵한 몸매에 정감 어린 표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했다. 피를 토하듯 여배우로서의 자신을 입지를 위해 강변하며 울부짖었다. 그녀는 신극 여배우로 자긍심과 함께 인생 험로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당시 여배우는 딴따라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기생으로 취급되던 시대였다. 식민 치하의 암울한 배경과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면서도 결단코 순복하지 않겠다고 절절히 외치고 있었다. 정체성과 소신이 강한 그녀는 아름답고 지혜로웠지만 시대와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여배우는 절규하며 외쳤다.
“내 이 더러운 운명을 버리고 배우로서의 인생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버릴 용기가 있다.”
출생부터 불행했던 그녀는 비극조차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었다. 연극을 보다가 중간에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피곤이 눈꺼풀 위로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눈이 감기면서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연극은 끝난 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지인(知人)이 말했다.
“아니 연극 보다 말고 웬 잠을 그리 자요? 배우가 연기하면서 자꾸 쳐다 보더라고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글쎄 갑자기 잠이 막 쏟아지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때였다. 누군가 옆을 지나면서 자꾸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계속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뒤돌아서는데 누군가 내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뒷모습이 어딘지 낯익었다.
예술회관 밖으로 나오니 또다시 뙤약볕이 엄청난 기세로 퍼붓고 있었다. 얼마나 더운지 시멘트 블록조차 불에 달군 것처럼 발바닥이 뜨거울 정도였다. 뜨거운 바람을 안고서 우리는 휘적휘적 걸었다.
교각을 건너니 왼쪽으로 공지천 알림판이 보이고 천주교 성당과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거리는 깨끗하고 각종 여름꽃이 지천으로 피어 주변이 온통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신호등 네거리 사이로 중앙시장이 보였다. 음식점 간판과 상가 골목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멘트 포장 도로 위에도 노점상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상가를 지나 교차로를 지나자 고등학교가 보였다. 춘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명문 고등학교였다. ◯◯에 있을 때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인심이 후덕한 동네 부녀회장이 있었는데 그녀가 강원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모 여고를 나왔다고 했다. 그 동리에서 유일한 모 여고 출신이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나보다 5살 많은 여교사가 그 학교 출신이었다. 명문여고를 나온 여자는 어디를 가나 인정과 후대를 받았다.
35년 전, 이 거리를 지나고 나서 처음 밟는다. 공무원 연수교육을 위해 방문했을 때 춘천은 논밭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리라곤 짐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서울 전철과 직통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35년이란 세월이 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처음 갖는 직장이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철없고 어리석은 게다가 겁이 많고 소심한 나였다. 얼마나 철이 없고 어리숙했는지 부임한 지 일주일도 안 됐는데 교육청에서 교육감님이 학교를 방문해 신신당부하며 말했다.
“아직 어린 여선생님입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이 먼곳까지 왔는데 교장  교감 선생님 여러 선생님들께서 특별히 관심 가지시고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이곳은 군 주둔지역 아닙니까?”
교육감은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순간까지 내 안위를 부탁했다. 그땐 잘 몰랐었다. 그것이 배려이고 돌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35년 세월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다. 세월은 간단없이 흘렀어도 마음은 어느새 그 시절로 가 있다. 그때는 젊다는 이유만으로 미래에 대한 당당한 포부가 있었다.
지금이야 공무원이 철밥통인 시대라 퇴직 때까지 안전이 보장되지만 그때는 최하위급으로 취급되었었다. 급여 수준이 일반 회사보다 삼분의 일 수준이었다, 하위급 공무원 한달 월급이 9만원이라면 (교사는 15만원) 일반 회사 초봉은 30만원이었다. 그래서 공무원은 그다지 전망이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다만 공직자라는 자긍심과 정년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섣불리 그만 둘 수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거의 두 달 간격으로 상여금이 있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더구나 사회활동 경험이 전혀 없고 대인기피증이 심한 나로서는 더더욱 그랬다. 23세 막 대학을 졸업한 나는 춘천시 강원도 교육청에서 발령장을 받고 소양강 선착장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배표를 샀고 승선했다. 쾌속정은 1시간 넘게 달려 ◯◯에 닿았다.
봄이라 개나리와 진달래가 선착장에 가득 피어 있었다. 낭만 100퍼센트였다. 처음 대하는 낯선 객지 표정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에서 읍내로 들어가는 일반버스를 타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데 꼭 영화 찍는 것 같았다. 읍내에서 다시 ◯◯◯리로 가는 도내 버스를 탔다.
논에서는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막이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도로는 군 트럭이 대부분 지나갔고 이따금 경운기도 지나갔다. 이윽고 목적지에 내렸다. 형제슈퍼 상호가 보였다. 그 맞은편으로 중학교가 보였다. 거기서 다리 하나 건너면 면사무소가 있다 했다.
나는 슈퍼 옆길로 난 도로를 따라 걷다 교각을 건넜고 이윽고 내 근무지에 도착했다. 주변이 온통 논밭이었다. 학교 바로 옆이 대대 본부였고 그 너머는 비무장 지대고 펀치볼을 넘으면 바로 북한이었다. 나는 당시 직장에서 유일한 서울 출신이었고 동료들은 대부분 나보다 연배가 20년 이상 차이가 났다.
제일 젊은 여교사가 나보다 5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대차이가 났다. 그것도 극심하게. 더구나 그곳은 농촌 지역으로 조선시대 같은 사고 발상을 하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그럭저럭 넘어 갔는데 문제는 퇴근 이후였다. 대화 상대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나였다. 그래서 꿈을 이루었다고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공백이 미칠 듯한 외로움으로 다가왔다. 말도 안 통하는 직원들과는 할 말도 없었다. 나는 주말이면 무조건 읍내로 나가 돌아다녔다. 거기서 알게 된 또래의 여자들이 있었다.
나처럼 공직 생활하는 관공서 여직원들이었다. 예를 들면 군청이나 경찰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이었다. 어느 해 봄, 춘천에서 공무원 연수교육이 있었는데 그때 모두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서울 사람과는 천지 차이였다. 어릴 때 고향 개울물에 멱을 감던 일, 친구들과 남의 밭에 들어가 서리 해먹던 일. 동내 오빠와 몰래 데이트 하다 집안 어른들한테 들켜 치도곤 당하던 일.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읍사무소에 근무했는데 사는 곳은 남면에 있었다. 읍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주변에 인가(人家)는 몇 십호 되지 않고 온통 논밭뿐이었다. 그녀는 읍내에서 여고를 나왔는데 그 어렵다는 공무원 시험에 붙어 고향에서 근무하게 된 케이스였다.
심성이 곱고 넉넉한 마음씨를 지닌 아가씨였다. 농사짓는 집안을 돕느라 도시로도 못 떠나고 아까운 청춘을 썩히고 있었다. 사람이 그리웠던지 공무원 연수교육에서 만난 내게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한번 찾아간 적이 있었던가?
아! 이제 생각난다. 그녀가 무릎이 아프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하소연하던 기억이 난다. 처음에는 잘 들어주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짜증내며 외면했었다. 그래도 그녀는 섭섭한 말 한마디 없이 내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시골 농가였던 그녀의 방안에 들어섰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묻던 말이 있었다.
“선생님은 왜 서울이 아닌 이 먼 시골까지 오시게 되었나요?”  “서울에 티오가 꽉 찼고 경기도도 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그래도 난 이곳이 좋아요.”
“시골 생활 답답하지 않으세요?”
“물론 그렇죠, 사실 얼마나 버틸지 저도 궁금해요, 서울은 눈만 뜨면 돌아다닐 때도 많은데 여긴 기껏해야 읍내 장구경 뿐이니.”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여기만큼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은 없을 걸요.”
물 맑은 건 인정하지만 공기는 정반대였다. 여름이면 논마다 농약을 어찌나 뿌려대는지 창문을 열어 놓을 수가 없었다. 또 최전방 지역이라 밤이면 총소리도 들렸고 특히 추수가 끝나고 나면 대대적으로 작전 훈련이 시작돼 대포소리로 잠을 설쳐야 했다.
그곳은 모든 게 군(軍) 위주였다. 도로도 민간인도 군(君)에서 실시하는 모든 정책이 군(軍)을 위한 것으로 간주됐다. 당시, 그곳에만 유독 통행금지가 실시됐는데 밤 10시 이후에는 세상 없어도 외출 금지였다. 또 주요 요소마다 감시 초소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보안부대라 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무조건 신고부터 해야 하는 게 그곳 주민들의 일이었다. 산에 가면 북에서 뿌린 삐라가 대량 발견됐고 간첩이 잡혔다는 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그런가 하면 교육계에서 벌어지는 난잡한 소문도 들려왔다. 남녀 교사 사이에 일어나는 각종 불륜 스캔들이었다.
소문은 어찌나 빠르게 번지는지 교육청에서 경고성 지시사항이 하달 된 적도 여러번 있었다. 한번 춘천으로 출장 다녀온 나는 재미가 붙었는지 또다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그곳을 떠나오는 날까지 출장 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당시 밤 마실을 다니다 보면 풀숲에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형광빛 날파리 같은 것이 풀숲을 날아다니는데 너무나 신기했다. 또 밤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 깨알 같이 박힌 별을 볼 수 있었다. 마치 하늘을 아름다운 별자리로 수놓은 듯 정겨운 모습이었다.
주민들의 의식은 조선시대를 연상케 했다. 마을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미모의 마담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귀공자처럼 잘생긴 아들이 하나 있었다. 본처가 아들을 못 낳자 남편이 첩을 보아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다방 마담의 아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재미있었다.
본처는 시부모의 박대를 참아가며 힘든 농사일을 하고 첩은 다방을 운영하면서 생활비를 보태는데 둘 다 사고방식이 매우 자유로웠다. 본처는 시부모의 극심한 구박 속에 살면서도 남편과 첩의 존재를 인정했다. 첩이 돈을 벌어 생활비를 대니 남편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다녀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다방 마담도 마찬가지였다. 본처가 힘들게 농사지어 보내는 쌀과 야채 등을 거저 먹으니 생활비는 자기가 대는 게 당연하다 했다. 본처와 첩의 자식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사이가 좋았다.
어쩌다 동네 여자들과 본처인 여자가 이야기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에구,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망 쳐서 새신랑 얻어 살지, 뭣하러 힘든 농삿일에 시부모 박대까지 참아가며 살아요?”
“아들을 못 낳으니 별 수 있나요? 그래도 애 엄마가 다방 운영해서 생활비도 대고 하니께 사는 데 별 지장은 없어요.”
사람들은 말했다. 저러니 첩꼴을 보고 살지. 본처는 심성이 너그럽고 착했다. 남편이 첩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온 동네를 휘젓고 다녀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가 하면 없는 시골 살림에 시부모와 시동생까지 모시고 사는 여자가 있었다. 시부모와 남편의 박대가 심했는데 문제는 시동생이었다.
농사일은 나 몰라라 팽개치고 밖으로만 나도는데 얼마나 철이 없고 멍청한지 몰랐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막노동을 업으로 살아가는데 집안에 생활비는 단 한푼도 내놓지 않았다. 하는 일이 동네 돌아다니며 술 퍼마시고 남의 싸움판에 끼어 들고 못된 일은 도맡아 했다.
게다가 가끔씩 조카들도 울리고 형수한테 대들기까지 했다. 그런 집안에 초상이 났다.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던 남편이 드디어 운명한 것이다. 남편은 평소에도 성질이 고약해 처자식 구박하는 걸 예사로 알고 살았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한없이 너그럽고 인심이 후하면서도 유독 처자식한테만 욕설과 매질을 해대며 괴롭혔다.
여자는 날마다 눈물로 살았는데 그 남편이 그만 암에 걸려 운명하고 만 것이다. 사실 남편은 자기 병명도 모른 체 죽었다. 자기가 죽을병에 걸린 걸 알면 처자식 먼저 죽이겠다고 나설 인간이었다. 동네 불쌍한 사람들한테는 쌀가마니까지 갖다 주면서 온갖 생색을 내던 인간이 처자식에게는 늘상 행패와 모진 말로 괴롭혔었다.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 했다. 그렇게 모질게 괴롭히던 남편이 죽었는데 아내 눈에서 눈물이 날까. 아니면 차라리 잘 됐다며 시원해 할까. 사람들은 궁금증을 가지고 초상집으로 몰려갔다. 여자는 죽은 남편 시신 옆에서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저리도 슬피 울까. 나 같으면 웃고 말 텐데. 아니 자기 설움에 우는 건지도 몰라. 한편 시동생은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동네 사람들 볼 때마다 큰 소리로 말했다.
“이따 우리집에 술 마시러 와유.”
“왜 무슨 좋은 일 생겼나?”
“우리 형이 죽었어유, 아주 저 세상으로 가 버렸어유.”
“그런디 뭐가 그리 신나게 그렇게 다니는감.”
“초상이 낫으니께 알리는 거구먼유. 이따 술 마시러 와유.”
그는 형이 죽었다는 데도 신이 나게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하나밖에 없는 즈이 형이 죽었는데 뭐가 저리 신나서 난리람. 여자는 남편상을 치르고 나서 농사일을 하며 겨우 살아가는데 시동생은 사사건건 불란만 일으키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그를 미실이라 지칭했다. 미실이란 강원도 사투리로 약간 모자르고 철이 없다는 일종의 방언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나를 두고도 미실이라 하지 않았을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동네는 농사짓는 원주민과 군인 가족이 상주했는데 그로 인한 에피소드가 많았다.
대부분의 직업군인들의 아내는 기가 세고 억척스러웠다. 남편들이 새벽에 군장(軍裝)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가도 걱정 한번 안 했다. 똑똑하고 황소라도 잡을 듯이 건강했다. 장교들 부인 간에도 서열이 존재했는데 남편이 육사 출신이냐 ROTCS 냐에 따라 진급 차이가 났다.
내가 근무하는 바로 옆에 대대본부가 있었는데 그 부대장은 ROTCS 출신으로 월남에 파병 되었다가 군에 눌러 앉은 케이스였다.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로 미인이었다. 장교 중에서도 육사 출신은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승진에 있어서 일순위로 꼽혔는데 부인들이 내조가 대단했다.
부인들의 학력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는데 이대 출신이면 어느 정도 승진이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은 자녀가 초등학교 5학년만 되면 거처를 서울로 옮겼는데 대부분 대령으로 전역했다. 장군으로 승진하는 경우는 육사 출신 중에서도 매우 드물다 했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는데 하나회 출신들이 승진이 가장 빠르다고 했다. 직원들은 가끔씩 나를 두고 말했다.
“정현미 선생도 군납(軍納)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교감과 교무주임은 웃으며 말했다.
“서울 가면 괜찮은 총각들이 널렸을 텐데 굳이 군납(軍納) 들어가려 하겠어요.”
그때 교무실 문이 열리면서 중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들어왔다. 그는 교감과 눈인사를 나누고 나더니 대뜸 나를 보면서 말했다.
“혹시나 우리 부대 사병들이 선생님께 귀찮게 하거나 그러지 않나요?”
“그런 일 없습니다.”
“그렇담 다행이고요.”
그들은 동네 다방 아가씨 이야기를 했다. 형제 슈퍼 건너편에 향수 다방이 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아가씨 부모님이 학교 교감이라는 것이었다. 이미 보안부대를 통해서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한번은 저녁 늦게 학교 관사 앞에 있는 수도다방을 간 적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데 주인 마담이 앞에 와 앉더니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서울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수도 여고를 나왔는데 결혼한 지 10년 만에 이혼했다고 한다. 왜 이혼했냐고 하니까 남편이 10년 동안이나 살면서 전혀 속을 안 주었다고 했다.
몸만 옆에 있을 뿐 마음은 전혀 딴 곳에 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혼했는데 너무도 상처가 커서 아예 먼 이곳까지 와 다방이나 운영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가 부리는 레지 아가씨들한테도 늘 말한다고 했다.
“여기 출입하는 군인들 사병이 됐건 장교가 됐건 절대 정(情) 주지 마라. 상처 받는다. 좋을 때는 간이라도 떼줄 듯이 해도 떠날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간다.”
아! 난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인생공부를 어느 정도 한 것 같다.
바로 그녀를 통해서. 얼마 후 수도 다방은 문을 닫았고 음식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동료 중에 40대 부부교사가 있었다. 4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여교사의 남편은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맞벌이 하는 아내 덕에 돈을 물 쓰듯 하는 그는 오토바이에 여자들을 태우고 다니며 염문 뿌리기에 바빴다.
  못생긴 주제에 어찌나 멋을 부리는지 옷과 헤어스타일이 매양 바뀌고 여자도 수시로 바뀌었다. 어느날 군 교육청에서 사생 대회가 열렸다. 심사위원은 여교사의 남편인 중학교 미술선생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아이들도 사생대회에 나갔는데 상을 모두 휩쓸어 왔다. 그때 그 여교사가 교무실에서 그 비밀을 폭로하면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제가 남편에게 말했어요, 우리 아이들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 다음 물감으로 덧칠할 거예요.”
  “어쩐지 어쩐지.”
  그날 사생대회에 나갔던 아이들은 모두 영문도 모른 체 상을 거머쥔 채 귀가했다. 동네 입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여자는 아이가 셋인데 나이가 26세였고 남편은 12살 많은 36세였다. 그들은 바로 윗 동네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주인집 딸과 머슴으로 만난 사이였다.
  16살 어린 나이에 머슴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 여자는 신혼 초부터 고생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다. 헛간 같은 방구석에 밥상도 없이 사과 궤짝에 밥 한그릇 김치 하나 놓고 먹었는데 막노동 하는 남편이 돈을 벌어도 한푼도 내놓지 않아 부부싸움을 억수로 했다고 한다.
  여자는 농사일에 공사판 막노동에 잡역부로 일하는데 남편은 돈 한푼 내놓지 않고 술주정에 폭력을 예사로 휘둘렀다. 그녀는 강철 같은 몸으로 엄청난 막노동에 매질까지 견디면서 자식 셋을 키우는데 이혼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차츰 생활이 안정 되면서 식당과 하숙집을 운영하는데 손님이 보는 앞에서도 남편은 욕설과 주먹질을 예사로 했다. 그런데 그녀는 죽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남편에 대한 식사 공대는 끔찍하게 잘했다. 그녀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어릴 때 우리 친정 아버지가 나를 무척이나 싫어했어요, 그래서 엄마랑 아버지랑 부부싸움을 자주 했어요, 그래서 내가 빨리 시집가서 저 꼴을 안 봐야지 생각했는데 저런 인간을 만났네요, 그래도 옛날에는 돈을 벌면 지가 다 쓰고 한푼도 안 내놓았는데 지금은 꼬박 꼬박 가져와요, 내가 두들겨 맞으면서도 돈 내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녀는 반지나 시계 등 장신구 하나 없으면서도 화장품은 고급 일색으로 썼다. 눈이 퉁퉁 붓고 못 생긴 얼굴에 투자를 하는 걸로 보아 남편 사랑은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유선생이 있었다. 그녀는 팔등신 외모에 탤런트 못지 않은 미인형이었다.
  부산에 있는 교육대학을 나왔는데 일부러 자청해서 그곳으로 근무지를 정했다고 한다. 애인이 내가 근무하는 학교 옆에 있는 대대본부 중위였다. ROTC 출신에다 키가 크고 잘 생긴 편이라 지나가던 여자들도 한번쯤 되돌아 볼 만큼 미남이었다. 어떻게 사귀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녀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났어요, 저 사람이 여기 부대에 근무하는 거 알고 내가 일부러 이곳으로 근무지를 정한 거예요, 님도 볼 겸 뽕도 딸 겸.”
그 말이 얼마나 멋있게 들리던지. 두 남녀가 읍내에서 데이트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문이 빠르게 번져 군(君) 전체가 흔들 흔들할 정도였다. 내가 그곳을 떠나올 무렵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전역과 함께 고향인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나는 그곳에서의 기억을 내 소설로 철저히 우려먹고 또 우려먹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로 각색하기까지 했다.
인생은 세월과 함께 경험이라는 노하우를 제공한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여전히 어리석을까. 그 많은 세월을 두고 깨달은 게 있다면 난 어쩌면 이리도 어리석을까 하는 것이다. 세월 속에 위기와 고난을 겪으면서 삶에 대한 노하우와 대처 능력을 갖추었을 법한데 난 그러지를 못한 것이다.
지금도 위기가 닥치면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허둥지둥 당황하며 때를 놓치기도 하고 손해 보기 일쑤다. 한번 피해의식이 발동하면 분별력이 떨어지고 이성을 상실한다. 일순간 흥분도 잘하고 같은 실수를 똑같이 반복할 때도 많다. 그 정도면 두뇌에 심각한 난기류가 발생한 게 아닐까.
나는 지금 지인(知人)과 효자동을 지나 중앙시장 입구에 들어서고 있다. 내 눈이 빠르게 사방을 둘러보고 있다. 혹시나 그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얼마 전에 만난 여고 동창 혜영이가 말했었다.
“현미야, 경자가 춘천에 있는 중앙시장에서 장사 하고 있대, 누가 지나가다가 봤는데 경자가 틀림없대. 세상에 잘난 척 고매한 척은 지 혼자 다하고 다니더니.”
생각해 보니 그녀와 헤어진 지도 꼭 30년이 넘었다. 이유는 그녀가 내 첫사랑인 그를 야유하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는 사관생도 1학년이었다. 어리고 철없던 내 눈에 그가 눈부신 환상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는 거의 멘붕 직전이었다. 집안사정은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아닌데도 나는 대학을 고집했다. 단식투쟁까지 해가면서. 그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야지, 꼭 합격하길 바래.”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그는 공군 파일럿이 되어 서울을 떠났고 나 역시 서울을 떠났다. 내가 그를 사랑한 건 순전히 환상 때문이었다. 그가 내게 하는 말 한마디도 확대 해석했고 나를 향한 관심쯤으로 알았다. 하루종일 그에 대한 환상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분열증이 올 것 같았다. 나는 나에게 전혀 관심도 없는 그를 두고 매일 소설이나 써댔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내 장래 희망은 소설가에요.
  그가 말했다.
  “나도 한때 소설을 쓴 적이 있었지, 포기하지 말고 꼭 소설가가 되어야 해. 내가 도와줄게. 절대 포기하면 안 돼.”
  그러면서 그는 내가 자기를 좋아할까봐 미리 방어막 치는 말도 했다. 거칠게 행동하면서 나를 꾸짖는 듯한 말도 여러번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생각보다 보수적이었고 까다롭고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점이 내 마음을 자극하면서 집착현상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거리를 걸으면 사관생도 제복 망토 안의 붉은 빛이 번쩍이는데 이 또한 환상이었다. 그때 내 안에서 엄청난 불안이 두려움과 함께 또아리를 틀고 일어났다. 왜 이렇게 슬프고 외로운가. 이건 아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가슴 아픈 건 사랑이 아니다.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말했다. 그는 너를 절대 좋아하는 게 아니야, 좋아하는 여자에게 불안과 고통을 주는 건 사랑이 아니야. 상관없어 난 그저 소설만 쓰면 되니까. 그러자 그녀가 내 약점을 들먹이면서 내 분노를 촉발시켰다. 내 아픔을 자극하고 내 열등감을 꼬집는 가슴 아픈 말이었다.
  “그 사람이 왜 너를 만나 준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그 사람 찾아가지 마, 그럴수록 너만 상처 받아, 그 사람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 때문에 힘들어 하는지도 몰라. 자기가 진짜로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 지난번에 면회 갔을 때도 훈련 나갔다면서 안 나왔다며?”  
  순간 나는 이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곧바로 나도 그녀의 약점을 공격했다.
  “너는 니가 뭐 대단한 줄 아는데 착각하지 마, 너가 남한테 내세울 조건이 뭐가 있다고 큰소리야?”
  가진 건 쥐뿔도 없는 주제에 그녀는 자존감이 강했다. 자신과 가족을 대단한 특권이라도 가진 양 마치 명문가족처럼 이야기했다. 그녀가 예의바르고 배려심 깊은 건 나도 인정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남을 무시해도 되는 조건은 아니지 않은가.
  결정적으로 내 속을 뒤집은 건 그가 나를 사랑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 가난하고 힘든 상황을 비웃은 말이었다. 당시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신세였기에 그 말이 더 가슴 아팠다. 나도 지지 않고 그녀에게 대거리를 했다.
  “난 그래도 대졸 출신이다.”
  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한 말이지만 아차 싶었다. 집안사정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녀의 과거를 그대로 찌르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여고 때, 바늘과 실이라 불릴 정도로 절친했던 그녀와 나였다. 내 아픔을 그대로 받아주고 조언해 주던 명민하고 사려깊은 그녀였다.
  그래서 더 믿고 의지하고 위로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거칠고 사나웠는지 모른다. 상처가 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랑받지 못한 아픔이 가장 컸다. 대체 사랑받는다는 건 뭘까? 난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사랑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말할 수 없는 상처와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가족으로부터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7남매의 막내로 늙으신 부모님과 언니 오빠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다만 집안의 몰락으로 그녀의 대학 진학이 막혀 버린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가슴에도 생채기가 쌓이기 시작했다. 말이 행동이 점점 거칠어졌고 짜증도 자주 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두 달 쯤 되었을까. 어느날 그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이상하게 침착했다. 이미 소문으로 듣고 있었기에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들었다. 내가 쓰는 소설의 한 대목으로 알아들었다. 집안에 말할 수 없는 환란이 불어 닥쳤고 날마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우울증이 심화 되면서 무기력과 신경불안증과 분노, 절망까지 추가돼 자살충동까지 왔다. 도저히 숨을 쉬고 살 수가 없었다. 몸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어 바깥출입조차 할 수가 없었다. 집안형편으로는 어떡하든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울증으로 온 몸이 망가져 있었다. 정신이 회로를 이탈 했는지 자꾸만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렇게 수렁 속을 헤매던 어느날 꿈을 꾸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면회를 갔는데 조화로 상징되는 국화가 내 앞에 놓여져 있었다. 꿈속이었지만 충격이 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헬기 사고로 순직했다는 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그가 결혼한 지 2년 쯤 되었던 때 같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나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소설로 몇 번 썼던 기억이 난다. 정신이 아득했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그의 죽음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한낱 추억거리도 안 되는 그와의 기억을 두고 내가 슬퍼하고 절망한단 말인가. 그냥 소설 한편 쓴 셈 치자. 그런데 이것조차 내가 꾸며댄 감정은 아닐까. 내가 스스로 꾸며낸 감정 놀음이 아닐까.
  그 끔찍한 고통에서 나를 구해 준 건 소설이었다. 소설로 나는 나의 모든 원한을 갚아버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알바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을 낮추다 보니 알바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 주변에 악머구리 같은 인간 악마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약점을 교묘히 파악해 멸시하는 말을 무시로 퍼부었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불덩어리가 생기면서 화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속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머리칼이 한웅큼씩 빠지고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나를 본 한의사가 대뜸 말했다.
  화병났구먼.
  그럼에도 돈벌이를 멈출 수 없었다. 죽기 살기로 직장생활을 했는데 어딜 가나 갑질의 횡포가 심했다. 이미 멘붕에 빠진 나에게 날마다 상처와 분노가 쌓여갔다. 아침이면 얼음수건을 머리 위에 얹어 놓고 집안일을 했다. 출근해서도 냉동실에 있는 얼음수건을 꺼내 머리 위에 얹었다.
  내 머리 위에서 얼음이 녹으면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분노를 삭이다 한계치에 도달하면 사표를 내던지고 여행을 떠났다.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청량리 역사로 달려가 표를 끊고 탑승했다. 낯선 풍광이 차창 밖을 스칠 때면 분노가 사그러들어 안심이 됐다.
  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그에 대한 그리움을 저주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남의 남자였던 그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수렁 속을 헤매며 세월이 흘러갔다. 늘 끝간 바닥을 치달으며 말과 행동이 거칠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 소설 습작에 매달렸다.
  글은 내 한풀이 대상이 되어 내 분노를 그대로 받아주었고 차츰 마음이 정리면서 안정이 찾아왔다. 그리고 어느날 기적처럼 소설가가 되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받았고 또다시 백수가 되면서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백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본업을 팽개치고 난 후부터 난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졌으니까. 그 어떤 시도도 노력도 할 수 없을만큼 멘붕에 빠지자 백수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알바자리라도 나서면 또다시 인간 악마들이 내 곁을 에워쌌고.
  백수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폐해는 엄청났다. 돈을 벌면 병원비 충당하기에도 바빴다. 그런데 소설가가 되고난 후 백수가 되니까 오히려 집중력이 강해지면서 소설이 완성되었다. 소설은 내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면서 내 안의 어둠을 밝혀주었다. 그를 내 소설 주인공으로 초대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어느날 소설을 쓰다가 여고동창인 그녀가 한 말이 생각났다.
  ‘자기가 진짜 사랑하는 여자에게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녀 말이 옳았다. 그래서 나는 더 슬프고 가슴 아팠다. 그에게 건넨 내 외사랑이 너무 부끄럽고 슬펐다. 그녀 말대로 그는 나에게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 내가 꾸며댄 자작극이었다. 그를 만났을 때 불안했던 이유가 바로 그 증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난 헛된 망상에 빠져 수십 년의 세월을 낭비한 것이다. 내 열등감을 그에게 보상받기 위해 내가 꾸며댄 소설을 두고 수십년 간 나 자신마저 속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난 당신과 약속한 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참모총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난 또 그를 내 소설 속에 끌어들여 거짓나부랭이를 써대고 있다. 난 그동안 힘겨운 삶을 살아내느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난 요즘 나 자신에게 묻는다.
  인생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아왔는가.
  삶의 존재 목적에 대해 내가 만난 육십이란 나이는 당황하고 있다. 어느날 나는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쓴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결정권자는 절대자에게 있다. 즉 신의 은총으로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한번은 치매에 걸린 남편을 치다꺼리 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23년 간 봉양했는데 남의 이야기 하듯 했다. 요즘은 의술이 발달해서 웬만하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던데 일찍부터 서두르지 그랬냐고 하면 유전이라 소용없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평생을 공무원으로 지냈는데 60대 초반이 되니까 치매증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했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인데 지금은 치매 요양센터에 아침에 맡겼다가 저녁에 다시 찾으러 가는데 불쌍하다는 말만 했다. 남편은 인지 기능이 마저 망가져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TV만 본다고 했다.
  주변사람들에게도 남편이 치매라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평생을 치매 환자 뒷바라지 하고 살면서 잘 웃고 친절했다. 다행히 아들 딸이 효자 효녀라 돈 걱정은 안하고 산다고 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 하다가도 남편 모시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끝마다 우리 아저씨 우리 아저씨하며.
  남편이 잘 나갈 때는 돈 자랑하며 살다가 퇴직하고 나면 밥해주는 것 귀찮아서 밤낮으로 쏘다니며 사는 여자들이 많다. 하루 세끼 밥 해주는 거 귀찮아서 삼식이라며 남편을 벌레 보듯 하는 여자들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죽은 남편의 연금을 타먹고 사는 여자들이 제일 부럽다고 하는 여자들도 있다.
  돈만 있다면 남편이 없어도 무방하다는 세상이다. 희생이니 내조니 하는 단어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는 여자들도 많다. 세상에는 온통 악인들 천지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의인과 천사들도 많다. 의인과 천사의 특징은 생각의 틀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한 몸 희생해서 상대를 구하자는 게 아니다. 이미 닥친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이다. 원망이나 미움이 애초부터 생기지 않게 생각이 바르게 정해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역경 앞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묵묵하게 견뎌낸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어떤 생활 속에서도 마음먹기 따라 평안과 지옥이 엇갈렸다.

  멀리 춘천 역사(驛舍)가 보였다. 가파른 에스컬레이터 위로 많은 발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어느덧 산등성이 너머로 지고 있었다. 벌판에 때 아닌 코스모스가 무리져 피어 있었다. 원두막도 보였다. 세상은 온통 구경 거리로 가득했다.
  앞서 걸으며 내가 말했다.
  “◯◯에서 떠나올 때 가지 말라고 붙잡은 사람이 있었어요?”
  “누가 붙잡았는데요?”
  “나보다 1살 어린 총각선생이 있었는데 나보고 가지 말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더라고요, 2년만 참았다 같이 가재요.”
  “어딜요?”
  “자기 고향 충청도로, 내가 그 촌구석이 싫어서 떠나는데 또다시 시골로 가자니까 기가 막혀서 싫다고 했죠.”  “작가님을 좋아했었나 봐요, 같이 떠나자고 한 걸 보면.”
  “좋아하긴 뭘요, 촌구석에서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내가 떠난 뒤 술을 억수로 퍼마시고 그러더니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대요.”
  나는 또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곳에 있을 때 교감 선생님께서 나보고 교회 나가서 신앙생활 하라고 조언하신 적 있었어요, 자기는 교인도 아니면서. 그땐 잘 몰랐는데 모두들 내게 관심 갖고 사랑을 많이 해 주셨던 거 같아요, 두 달 간인가 동네 교회 출석했었는데 떠나오는 날 교회 청년회장이 선물이 주더라고요, 성화 그림 같았는데…… 아참, 그 사람이 내게 프로포즈 했었어요, 외국에 다녀올 건데 1년 동안만 기다려 달라고 했던가. 그런데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걸까.”
  이야기 하다 보니 발걸음이 어느새  춘천 역사(驛舍)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가슴 속에 감기듯이 들어왔다. 때마침 열차 출발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인과 나는 뒤질세라 전동차 안으로 발걸음을 디밀었다.
  전동차가 막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창밖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순한 눈빛과 안타까운 표정으로 발을 구르며 내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경자야.”
  “현미야”
  우리는 동시에 소리치며 가슴이 아려왔다. 눈물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올랐다. 아쉬움과 후회, 아픔과 연민이 눈물과 함께 가슴을 적셨다. 차창 밖으로 그녀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열차는 전 속력으로 질주했다. 핸드폰 번호라도 물어 볼 걸.
  “그분인가요? 그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요즘 유트브에서 ‘추억이 말을 해’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시청하고 있다. 70-80년대까지의 시대 상황을 그대로 재연하는 프로인데 그때 유행하던 음악과 사람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생각난다. 어느날도 유투브를 클릭했는데 정감 어린 아나운서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사랑해서 미안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분명 미안한 일이 아닐 터인데 그대에게 건넨 제 사랑은 모두 미안한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서 미안했습니다.
  그대라는 사람을 알고 난 후에 얼마나 많이 흐느꼈는지 그래서 내 남은 눈물이 말라버린 채 이제는 무덤덤한 나를 보며 요즘 놀라곤 합니다.
  이제 어지간히 슬퍼서는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사랑해서 정말 미안했습니다.
  덧없이 주기만 했던 이 사랑에 마음에도 없이 받기만 했던 그대 얼마나 힘겨우셨겠습니까.
  그간 정말 사랑해서 미안했습니다.
  원하지도 않던 그대의 아픔받이가 되어 홀로 헤매던 이 바보같은 사랑을 보며 그대 또 얼마나 한스러웠겠습니까.
  정말 사랑해서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접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이 미련한 아이의 외사랑은 마음처럼 쉽게 접혀지지가 않아 앞으로도 기약 없이 그대에게 계속 건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미안함. 그대 가슴 안에 내 작은 빈자리 하나 남아 있다면. 」
  유투브 화면에는 우산을 쓰고 길을 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계속 비치고 있었다. 비를 흠뻑 뒤집어 쓴 연인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택시를 집어타거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화면 속의 남자들은 80년 대 초답게 대부분 장발을 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파머머리를 한 채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화면 속의 얼굴들이 대부분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인상이 험했다. 삶이 팍팍했던 탓일까. 거리와 도로를 적시는 거대한 빗물은 물결처럼 내 눈에서 눈물샘이 터지게 했다.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눈물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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