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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레킹 볼 (Wrecking Ball)
나라면+101-15 01:34 | HIT : 172
  레킹 볼 (Wrecking Ball)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몇몇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고,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제법 오래간만의 만남이었다. 처음 얼굴을 봤을 때의 반가움 만큼 흥겨운 시간을 보낸 것 같지는 않다. 오래전부터 들고 다니는 백팩을 가지고 가벼운 놀림을 당하는 건 여전했다. 하긴 최근에 완벽한 반가움이란 건 없었던 것 같다. 그게 아마도 가장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나의 긍정적인 생각이다.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고, 백팩을 메고 오롯이 혼자 걷고 있다. 이렇게까지 기온이 떨어질지 예상을 못한 탓에 추위에 비해 옷이 얇다. 차가운 공기가 입김으로 바뀌어 튀어나온다. 그리고 한심스럽기까지 할 만한 짧은 생각들이 스멀스멀 들기시작했다. 점점 밀도가 짙어지는 외로움과 한심한 내 자신이 투영되면서 느껴지는 자괴감이 날 우울하게 만든다. 그렇게 내 보잘것없는 밤이 시작한다….
오늘은 얼마나 취해 있는 걸까? 거리는 어둠의 정점을 향해 가듯 정적이었고 다습한 공기의 촉촉함이 느껴졌다. 더불어 기온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잠든 도시의 밤이 은밀하게 외형을 들어내면서 오히려 나는 시야가 편해지고 한기마저 친밀감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쉼 없이 걷고 있음에도 좀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육체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따금씩 추위에 대한 짧은 고통 때문에 멈춰버리고 만다. 차가운 공기덩어리의 수많은 결정체의 각각의 면이 내 뺨에 부딪혀 복수의 통점이 느껴지고 있는 듯했다. 그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온 낯선 차가움이 날 당황하게 만든다. 솔직히 내가 왜 걷고 있는지, 아무런 목적이 없음을 반복적으로 상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한기의 통점을 더 느끼고 싶은 가학적인 욕심인지 혹은 추위에 대한 인내력의 자기애적인 면모 탓인지, 좀처럼 무모한 걸음을 그만두지 않았다. 어쩌면 새로운 겨울에 대한 환영식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분명했다. 나는 겨울의 입구에서 서성이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내 추위에 지쳐있다가 불현듯 불어오는 봄바람에 들 떠 있기도 하더라도 말이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도통 위치를 알 수 없는 낯선 길을 걷고 있다. 쌀쌀하고 어두운 날씨에 제격인 산책인 셈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계단을 올라가고 오래된 벽이 마주 보고 있는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오늘 출입문에 난 작은 창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벽으로 꽉 막힌 술집에 두어 시간 앉아있었던 탓인지 낯선 한기가 달갑게 느껴졌다. 지금 산책의 주제는 외로움이다. 어쩌면 친구들과의 술자리 내내 외로움을 상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왜 지금의 감정을 외로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뭐라고 분명히 형태를 알 수 없는 진중한 감정 덩어리가 그것일까? 문득 주위의 모든 사물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라는 감정이 들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이를테면 바라보는 것, 들려지는 것, 발바닥이 지탱하는 것 등등의 인지들이 모여서 ‘나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고루함을 지닌, 견고하게 존재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라는 것. 나는 그 무엇과도 혹은 누구와도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즐거움을 공유할 수 없을 것 같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는 감정이 드는 것, 아마도 내게 드는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자면 그런 것이다. 그게 내 외로움의 내용인 것일까? 불쌍하고 애잔한 내 정체성과 동의어처럼. 나는 아마 긴 사연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나를 굳이 어떤 타입으로 표현하자면 말이다. 그렇게 일상 속의 비일상적인 감정이 작동하고 있다. 내부의 깊은 바닥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예민하고 특수한 감수성을 지닌 또 다른 자아가 형성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분명 지금이라는 시간이 지나가는 것은 불편한 상태인 것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온전하게 내가 이미 존재하는 주위의 것과 어울려 지금은 불편하지만 내가 다시금 어딘가에 속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전히 낯선 한기에 생긴 입김처럼 불안한 상태이다.
드문드문 가로등이 있었음에도 불편할 정도로 어두운 골목길을 벗어나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를, 조금은 넓고 밝은 아스팔트가 깔린 길에 진입했다. 그리고 점퍼의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로부터 10분 간격으로 두어 개비를 더 피웠다. 딱히 추운 날씨에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의 흥밋거리가 슬슬 반감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오리무중인 위치에서 벗어나 내게 익숙한 지리로 둘러싸인 곳으로 가야 한다. 어쩌면 시간이 제법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가로등 밑에 여전히 영업하고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고 한두 글자가 소실된 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냥 담배를 물고 오래된 길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문득 익숙한 공간을 발견했다. 몇 개의 골목길이 만나는 공간에 좁고 길게 놓인 놀이터를 발견했다. 그곳에 있는 여러 개의 판자를 이어 만든 벤치에 앉아 ‘미지의 공간에서 마지막’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담배를 물었다. 이내 지금보다 더 큰 길이 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보고 내가 있는 동네의 이름을 알아볼 생각이다. 물론 버스는 이미 끊어졌을 것이고 집과의 거리를 생각해보고 도보나 택시를 이용할 것이다. 웬만하면 걸어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늦은 시간에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쩌면 세상의 어둠을 지탱하는 태엽 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급하게 여러 개비의 담배를 피운 탓에 목구멍에서 무겁고 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추웠다. 오래지 않아 놀이터로 이어진 골목 중의 하나에서 긴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세트장으로 들어오는 연기자처럼 자연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사실, 이 표현은 그다지 어울리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다만 그림자에 그 표현을 썼을 뿐이었다. 가로등으로부터 조금씩 길게 이어지다가 뚝 끊어지듯 사라지는, 그리고 실체가 드러난다. 뚜렷하게 이목구비가 보이진 않았지만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과 좁은 금테 안경을 썼으며 야상점퍼를 입은, 대략 10대 후반이나 기껏 해봐야 20대 중반을 넘기지 않은 여자아이 같아 보였다. 벤치에 달리의 그림처럼 축 늘어진 채 앉아있는 나를, 어쩌면 어둠 탓에 늘어져 있는 모습이 벤치 일부라고 착각했는지, 아니면 애당초 늦은 시간에 벤치에 앉아있는 인간 따윈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지, 어떤 끊김 없는 걸음걸이로 그네로 다가와 앉았다. 한기의 고통을 순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최면에 빠지도록 이끄는 회중시계의 진자 운동처럼 그 소리가 날 마비시키고 있었다. 불안감, 그 소리가 멈추기를 바랐는지 혹은 긴장감이 도는 그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유지되기를 바라는지는 불확실했다. 그런데도 소리의 간격이 조금씩 이완되고 페이드 아웃되는 것처럼 미묘하게 소리가 작아지다가 이내 멈춰버린다. 심볼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으면서 끝나버리는 재즈 음악처럼. 최면의식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달리의 초현실주의의 캔버스로부터 어둡고 추운 미지의 거리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벤치에서 일어서는 순간, 가로등 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아마 나라는 존재를 이제야 인식했는지 놀란 듯 순간 우두커니 서서 나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인 것이다. 어쩌면 기억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말이다. 어쨌든 내겐 특별한 순간이었다. 하얗고 여윈 그녀의 뺨과 빛을 받아 반짝이는 안경테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이 스며드는 시간에 모을 수 있는 현금을 가지고선 높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 큰 크레인에 매달린 커다란 레킹볼에 기대어 서서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날 그녀를 기다린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다. 우리가 속해있던 곳을 떠나 우리만의 새로운 곳으로 향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을 안고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을 바라본다. 가는 도중에 가볍게 춤을 출 수 있는 곳도 들릴 생각이다. 언제나 그녀가 꿈꾸어 왔던 장면이다. 혹독히 차가운 공기의 단면들이 그녀의 뺨에 부딪혀 홍조를 만든다. 그렇게 그녀는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이건 닐 영이 부른 Wrecking Ball의 완벽한 재현인 것이다. 혹은 그것을 어떡하든 알리고 싶었다. 서로 마주 보고 있었던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빠져버렸다. 내게는 운명적인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소묘로 그려낸 이미지처럼 시간이 정지되고, 원래 존재했던 것들, 이를테면 녹슨 미끄럼틀과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었을 것 같은 그네와 더불어 최면에 빠졌던 벤치와 그녀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여준 가로등이 나를 흡입하고 하나의 완벽한 배경으로 만들어 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렇게 그곳엔 왠지 차디찬 쇳덩어리로 만든 레킹볼이 어울릴 법했다. 사랑을 쫓아 자신들의 공간을 버리고 떠나는 연인들처럼, 나는 그렇게 상상했다. 그리고 그녀는 어떤 서두름 없이 돌아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마치 흑백 필름으로 아주 긴 롱컷의 장면처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모든 게 Wrecking Ball 노래처럼 완벽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우두커니 상상을 이어간다. 우리 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라진,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일 필요는 없지만, 어차피 우리가 속한 곳은 다른 사람의 흔적조차 없는 순전히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잠시간 벤치에 앉아 소소한 얘기를 나눈다. 가령 아까부터 골목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를 보면서 각자가 갖고 있었던 고양이에 관한 화제를 끄집어낼 테고, 아마 나는 히쭉거리며 인간에게 말을 건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를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뒷면을 가진 달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이윽고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을 것 같은 서로의 외로움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우리만이 공유할 수 있는 장소란 게 있다는 걸 확인할 것이다. 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둡고 춥지만 레킹볼이 있는, 서로에 대해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공간.
로버타 플랙의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노래와 같이 레트로하면서 뭔가 뭉클함이 드는 그런 순간을 내가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일방적인 상상이었다. 그녀는 내 놀이에 참여하지 않은 채 묵묵히 나와의 거리를 벌려놓으며 걸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나라는 존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물론 어디에도 오래전 그 시절의 댄스파티 따윈 없을 것이다. 뭔가 기이하면서 나 자신에겐 자학적인 느낌마저 드는 어둠과도 어울리는 마법적인 감정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그녀가 아직 내시야 속에 있었다. 선택의 시간이다. 어쩌면 용기가 필요한 시간인 것이다. 아무도 날 떠밀지 않을 것이다. 초 바늘이 쉬지 않고 무겁게 시계의  원에 갇힌 채 분주히 움직이고 있음에도 지금과 동일한 시간을 나는 결코 다시 갖지 못할 것이다.
어둠의 알갱이가 냉각되어 밀도가 높아진 느낌이다. 과하게 습한 공기가 시선을 방해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쫓아 걷기 시작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조금씩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제력이 상실된 채, 나는 보잘것없는 중독자로 변해버린 걸까?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변명일 것이다. 그녀는 날 이해해줄 수 있을까?
“우린 숨을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같이 가고 싶다면 레킹볼에서 만나. 너는 예쁜 하얀 옷을 입고 오겠지. 오늘 밤 우린 춤추러 갈꺼야. 레킹볼에서 만나.”라는 가사가 있는 노래 따위에 그녀는 흥미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좀처럼 그녀와의 간격이 줄어들진 않는다.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뭔가 내 내부엔 주저함이 있다. 그럼에도 이내 그녀를 최대한 다정한 어투로 불러 세울 생각이다. 어쩌면 그녀는 완벽하게 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다시 자제력을 잃어가고 있다. 분명히 잊고 있었던 게 있다. 내가 나쁜 놈이라는 거다. 또 내 자신에게 변명하겠지. 그렇게 그녀는 나의 또 다른 희생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어떤 방식이든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내 백팩엔 그녀를 위한 하얀 드레스가 언제나처럼 준비되어 있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이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어 갈 것이다. 그렇게 오늘이 그녀의 마지막 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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