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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 리버티호와 잭-피시
김재농02-18 05:33 | HIT : 102
자유는 색도 형체도 없다.

그래서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지만 인간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귀하다. 인간은 종교적 정치적 때로는 인종적으로 자유를 빼앗기고 고통을 당해 왔다. 그 자유를 쟁취하기위해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다. 기나긴 투쟁은 인간의 역사를 고통으로 얼룩지게 했다. 뉴욕의 맨하탄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나 파리의 에펠탑은 자유의 상징이 아닌가. 인류는 그토록 자유를 열망하며 살아왔고, 더디어 자유는 온 인류의 것이 되었다.

미국의 상선 “LIVERTY" 호는 자유를 부르짖으며 태어나 자유롭게 대양을 항해했다. 6200톤 급의 대형 화물선이지만 전쟁 중이라 대포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말기에 일본의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대포 한 방 쏴보지 못하고 자유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 배가 인도네사아 발리의 동쪽 툴람벤 해안에 난파선으로 누워있다. 툴람벤은 그 배로 인하여 유명한 스쿠버다이빙 포인트가 되었으니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렇게 돌아가는가 보다.

발리의 덴파사르에 있는 리조트에서 이른 아침 “툴람벤”으로 향했다. 해안도로의 비좁은 2차선에는 덴파사르로 출근하는 오토바이 부대가 길을 메운다. 모두가 헬멧을 쓰고 도로를 휩쓸고 질주한다. 그 모습이 구경꺼리라기 보다는 장관이다. 짠디다사를 거쳐 동으로 동으로...험난한 아궁산 기슭을 돌아 거의 3시간 만에 툴람벤 비치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수평선이다. 아름드리 야자수가 좁은 해변을 따라 늘어서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비치에 서서 바라보니 마음이 스르르 녹아든다. 망망대해는 스트레스로 조여든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힘이 있다. 파도마저 잠들어 좋은 다이빙이 되리라 기대해 본다. 리버티 호야 내가 왔노라.

분위기를 즐길 틈도 없이 슈트며 장비 세팅하고, 브리핑하고, 바디 정하고...바쁘게 돌아간다. 수온이 따뜻하니 얇은 슈트에 웨이트(납덩이)도 가볍다. 더구나 후드도 필요 없으니 얼마나 간편한가. 차고 거친 동해바다 생각하면 그저 기분이 홀가분하다.

난파선은 해변 가까이에 있어 그냥 걸어 들어간다. 비치는 자갈밭인데 들어가니 바로 모래펄이 펼쳐진다. 검고 우중충한 모래다. 아궁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린 화산재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모래펄 위로 가든-일(Garden-eel)이 고개를 내밀고 몸을 흔든다. 보통 가까이 가면 게 눈 감추듯 숨어버리는데 이게 웬 일인가. 몸통을 거의 내밀고 음악에 춤추듯 흔들어 댄다. 마치 고사리 밭에 온 기분이다. 구경 잘하고 진행하니 바로 난파선이다. 천년의 세월이 고요 속에 잠든 듯 희미한 모습이 자못 신비롭다. 배의 형체는 알 수 없고 잔해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러나 바다 생물이 엉겨 붙어 부서진 조각이라도 칼라-풀하여 아름답다. 마치 볼품없는 겨울나무에 눈꽃이 피어 새롭게 피어나는 것과 같다. 선미(船尾)쪽으로 돌아드니 배의 형태가 완연하다. 역시 웅장하다. 산호들의 번식이 한창이다. 부채산호며 해송(海松) 그리고 항아리 산호가 제법 예쁘게 자랐다. 난파선은 아주 좋은 고기 집이다. 온갖 고기들이 숨바꼭질 한다. 그들과 눈 맞춤을 하며 선수(船首) 쪽으로 나오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잭-피시의 무리!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카메라 플래시가 불꽃을 튀긴다. 빙글빙글 돌아간다. 술래잡기를 하는지 강강수월래를 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간다. 완전 축제 분위기다. 축구공처럼 둥글둥글 뭉치다가 일순간 확 퍼지는가 하면, 회오리바람처럼 치솟을 때는 탄성이 절로 난다. 그야말로 군무(群舞)다. 군무라면 연출자도 있어야 하고 음악도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사불란한 군무를 할 수 있으랴. 우리가 듣지 못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음파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비밀을 알 수가 없지만 정말 신통하다. 난파선 구경은 잊어버리고 함께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2번째 다이빙은 배를 종주하는 것이다. 리버티호는 길이가 120m나 된다. 갑판이 내려앉아 허리가 꺾어졌다. 녹슨 거대한 대포를 발견했다. 겹겹이 녹이 슬어 마치 입술에 난 포진처럼 퉁퉁 부르텄다. 쓴 웃음이 난다. 대포는 크고 튼튼하다만 잠수함에 당했으니 대포 한 방 쏴보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배의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다. 붉게 녹슨 모습이 그야말로 처절하다. 마치 하이에나에 뜯어 먹힌 얼룩말의 갈비뼈처럼 처참하다. 아니! 이번에도 잭-피시 무리를 만났다. 그런데 가만 보니 분위기가 좀 다르다. 어쩐지 슬픔을 머금었다. 한(恨) 풀이 춤을 추는 것일까. 버선코를 세우고 사뿐사뿐 나아가다가 살풀이수건을 홱 뿌리며 격렬한 율동이 전개되는 살풀이 굿 말이다. 자유를 수호하려다 장렬히 격침된 리버티호의 한을 풀어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염원을 기원하는 기도의 춤일까. 그들도 리버티호의 최후를 아는지... 군무를 하면서도 그들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고 엄숙하다. 말은 못하지만 촉촉한 눈시울이며 슬픔을 표현하려는 그들의 몸짓에 필자의 감정도 동화되는 것은 어쩐 일일까.

점심 식사시간이다. 현지식이라니 떨떠름하다. 이럴 땐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로 먹어야 한다. 잭-피시 이야기가 나오니 모두가 감탄사를 토해낸다. 그 귀한 잭-피시의 군무를 두 번 씩이나 보았다고 행운에 감격했다. 그런데 현지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은 직원이라 했다. 그러니까 그 배에 근무하듯 언제나 있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리버티는 쓸쓸하지 않겠다. 잭-피시가 늘 놀아주니까.

3번째 다이빙은 난파선 속으로 들어가 그 내부로 파고든다. 들어갈 때는 꽃 대궐처럼 아름다운 산호로 장식되었지만 5장6부는 모두 날아가고 텅 비었다. 어둡고 침침한 그 속엔 햇빛이 빗살무늬처럼 스며든다. 사다리와 뒤엉킨 철골이 붉게 녹슬어 핏빛으로 변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무릇 자유를 수호하는 데는 대가를 치른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다. 지금 우리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선각들이 피를 흘렸다. 지금 세대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으면 또 언젠가는 자유를 빼앗기고 말 것이다. 안타깝다. 나오려고 하는데 또 잭-피시를 만났다. 그들은 도대체 하루 종일 저렇게 군무만하고 있으니...언제 쉬고 또 먹는단 말인가. 그들의 생태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지느러미를 흔들며 입이 쭝긋쭝긋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일까. 가만히 귀를 기우려 보니, 올 커니...들릴 듯 말 듯...

“우리에게도 자유를 달라!”

그대들은 한 없이 자유로운데 무슨 자유를 또 달라는 것이냐?

“우리도 바깥 세상에 나가고 싶다”

바깥세상? 밖에 나가면 너희는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자유를 달라는 것 아니냐?”

이거 야단났네!

“우리도 새처럼 하늘에서 군무를 하고 싶다.”

갈수록 태산이네!!

자유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저 미물(微物)에게도 그토록 간절하다니 하물며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야...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하지 않던가.

자유에는 한계가 있고 규범이 있다. 생명은 신의 섭리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것을 벗어나면 어느 종(種)을 막론하고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역사도 그것을 뛰어넘는 자유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많은 피와 땀을 흘리고서야 기본권을 성취하였지만 그래도 자유가 부족하다. 깃털 같은 자유 말이다, 먹고 사는데 얽매여 주어진 자유도 향유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4번째 다이빙을 실시했다. 바로 야간 다이빙이다. 플래시를 켜 들고 암흑의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다. 어둠에 젖어든 리버티 호는 마치 유령의 집 같았다. 구석구석 고기들이 잠을 잔다. 잭-피시도 간 곳이 없는 것을 보니 낮 동안의 고된 군무로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대신 진귀한 것을 보았다. 바로 버팔로 피시다. 1m도 넘는 대형 버팔로 피시가 무리를 지어 서성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낮 동안에 대양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모양이다. 사람도 참새도 밤이면 보금자리를 찾는데 고기들도 마찬가지인 줄을 이로 하여 아는 구나.

밤하늘엔 별이 빛난다. 자유를 잃은 리버티 호와 잭-피시의 군무를 남겨둔 채 우리는 떠나야만 했다. 깃털 같은 자유! 오늘은 정말 흐뭇하다.


(2012. 3. 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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